바실리카 Basilica
비교적 단순한 초기 농경 사회였을 때에는 시민들의 활동 공간이 광장 안 노천으로도 충분했지만, 새로운 시민사회가 형성되어 분쟁 사건도 많아지고 상업 활동도 늘어나게 됨에 따라 비가 오거나 햇볕이 강할 때에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실내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4세기 말경에 활발한 건축 사업과 유동자금 형성으로 프레토 르 법정과 환전상들이 카스토르 신전과 베스타 신전 사이 푸테알 리보니스에 자리잡았으나, 기원전 210년 화재로 베스타 신전만 간신히 피해를 면하게 되자 불타버린 상점가와 가옥들 자리에 바실리카가 들어서게 된다. 이 시기는 한니발 전쟁으로 인해 로마가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기 때문에 바로 건축 활동이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동방에서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야 바실리카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184년 최초로 포르키아(Porcia)바실리카가 세워졌으며, 뒤이어 오피미아(Opimia) 바실리카, 풀비아 에밀리아(Fulvia Emilia) 바실리카, 셈프로니아(Sempronia) 바실리카가 건축되었다. 다른 바실리카들이 후기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풀비아 에밀리아 바실리가가 현존하는 유일한 공화정 시대 바실리카이다.
바실리카의 한쪽에는 높은 단 위에 재판소가 있어 크고 작은 사건들을 처리했다. 부채 징수관들이 불운한 채무자들을 소환하였고, 드문 경우였지만 주인을 살해한 노예도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 노예의 하극상 사건은 처벌이 아주 가혹해서 그 집안의 모든 노예들이 처형 대상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재판소가 오늘날처럼 엄숙하거나 질서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밀폐 되지 않은 공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참관하는 가운데서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판사 업무는 콘솔 아래 직책인 프레토 르가 담당했고, 변호사는 대체로 기사 신분으로 법률과 수사학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바실리카와 초기 교회가 비슷한 구조를 가진 이유는 교회들이 바실리카의 건축 양식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베드로 대성당을 비롯한 많은 성당들은 바실리카라 부르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판사들이 제단 위에 앉았고, 피고와 방청객들은 오늘날 교회의 좌석들이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교회의 입구가 건물의 짧은 면에 있는 것과 달리 바실리카 입구는 긴 면에 있었다. 이처럼 입구의 위치가 다른 이유는 건물의 용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로마의 바실리카는 재판소에 은행, 상점 등 다양한 기능을 하는 건물이라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 관계로 출입구가 많아야 했던 반면 바실리카식 성당은 종교라는 단일 목적의 건물이라 출입구가 적은 게 엄숙한 예배 분위기에 더 적합했다.
현존하는 바실리카 유적은 에밀리아 바실리카와 율리아 바실리카, 막센티우스 바실리카다. 에밀리아 바실리카(Basilica Emilia)는 기원전 179년에 콘술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 리오르와 에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불타버린 옛 상점가 위에 세운 것이다. 원래 풀비아 에밀리아 바실리카였으나, 공화정 말기에 에밀리아 가문의 인물들이 수차례 복구함에 따라 거의 이 가문의 기념물로 여겨져 보통 에밀리아 바실리카로 불렀다. 원래 이 바실리카는 중앙 복도와 양옆의 측면 복도로 이루어진 대칭 구조의 건물이었으며(원로원 가까이 지붕 아래에 있는 원 건물의 잔해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광장 쪽으로 건물이 확장되면서 복도 하나가 추가되어(추가된 복도에 상점들이 들어섰다.), 현재 보이는 바닥 모양은 복도가 넷인 비대칭 구조이다. 이탈리아산 녹색 대리석 기둥들을 사용했고, 내부의 바닥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대리석으로 깐 것으로, 현재 유적지에는 그을린 대리석 바닥의 잔해가 보인다. 이 바실리카는 알라릭의 고트 족이 자행한 화재(로마 약탈)로 파괴된 후 5세기 초반에 마지막으로 재건되었다.
건물을 살펴보면, 사각 기둥 16개와 반원주들로 이루어진 직사각형의 열주 회랑식 2층 건물로 길이는 90m이다. 사크라 길 쪽의 벽이 건물의 정면으로 3개의 아치형 입구가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벽 장식 단편들은 회랑 2층에 있던 것인데, 사빈 족 방패 아래 깔린 타 르페아(사빈 족 병사들의 꼬임에 넘어가 성문을 열어주었다가 오히려 이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캄피돌리오 언덕지기의 땅), 라비니오 성벽 축조, 사빈 족 여인들의 약탈을 묘사하고 있다. 왼쪽 외벽 잔해들은 기원전 2세기의 응회석 블록들과 아우구스투스 시대 대리석 파편들이다.
원주 3개와 붉은 대리석 덩어리가 남아 있는 왼쪽 입구 열주 회랑 안이 신상가(Tabernae Novae) 자리로 환전상과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현재 입구 앞에는 2개의 장식 기둥이 놓여 있고, 내부 북서쪽 바닥에는 둥글고 짙은 자국들이 있는데, 이것은 환전상들이 떨어뜨린 동전들이 만족 침입 시 화재로 녹아 생긴 것이다.
이 바실리가 와 사크라 길 사이에 있는 조그맣고 둥근 자리가 대하 수구를 건설한 기념으로 클로 아치나 비너스(Venere Cloacina)상을 세워놓았던 곳이다. 클로아치나느 광장 지하를 가로질러 흐르는 대하 수구 클로아카마씨마를 신으로 숭배해 붙인 이름이다. 또한 이 지점은 10인 입법 위원회 위원장 클라우디우스 때문에 불행에 빠진 처녀 벼르기 니 아를 죽인 베르기니우스 사건의 현장이었고, 전설상의 사빈 인들과 로마 인들이 화해한 곳이기도 했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창건한 후 여자가 부족해 청년들이 결혼할 수 없게 되자, 사빈 족 사람들을 콘수스 신 제사에 초대한 후 남자는 죽이고 여인들만 납치하는 계략을 썼고, 이 때문에 두 종족 간에 싸움이 벌여졌으나, 이미 로마 청년들과 정식으로 결혼해 살림을 차린 사빈 족 여인들이 애원하여 두 종족이 이 자리에서 화해하고 종족을 합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의 동쪽 모서리에는 루키우스 카이사르(Lucius Caesar)의 비문이 남아있다. 친아들이 없었던 아우구스투스의 계승 정책 때문에 그의 친구이자 심복인 아그리파가 첫 부인과 이혼하고 과부가 된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재혼해 두 알들을 두었는데, 루키우스는 그의 큰아들이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로서 서열 1위의 계승 후보였으나 애석하게도 병사하고 말았다. 이 비문은 그가 죽기 전에 원로원이 바친 것이다.
101x49m 넓이의 율리아 바실리카(Basilica Iulia)는 재판소 규모가 가장 큰 100인(Centumviri) 법정이 자리한 곳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한니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저택과 구 상점가(Tabernae veteres)가 있었는데, 기원전 170년에 그라쿠스 형제의 부친이자 스키피오의 사위인 티베리우스 셈 프로 니우스 그라쿠스가 셈프 로니아 바실리카를 세웠다. 이 바실리가가 무너진 후 기원전 54년 폼페이우스와 권력다툼을 벌이던 카이사르가 자금을 대 새로운 바실리카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것이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완공된 율리아 바실리카로 이 바실리카는 완공 후 곧바로 화재를 입어 기원전 12년에 재건되었고, 283년에 다시 화재가 나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복구되었다.
광장 쪽에 위치한 율리아 바실리카의 정면은 2층 열 주식 회랑으로 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바깥쪽으로 문이 있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바실리카 안 곳곳에 조각상과 놀이판을 새긴 바닥 낙서들이 남아 있다. 주 입구 양쪽 외벽에는 2개의 조각상 기반이 있는데, 그리스 조각가들(오른쪽은 폴리 크레토스, 왼쪽은 티마 르코스)의 이름이 기록된 비문이 붙어 있다. 중앙 바닥 밑에는 셈프 로니아 바실리카의 잔해와 더 아래에 스키피오 저택의 임 플루 비움 물받이 공간) 유적이 보인다.
막센티우스 바실리카(Basilica di Massenzio)는 306~312년 사이에 벨리아 능선 위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 현관 자리에 조성한 65 x 100m 규모의 커다란 기단 위에 막센티우스가 세운 로마의 마지막 바실리카이자, 규모가 가장 큰 바실리카이다. 막센티우스는 이 거대한 건물이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312년 밀비오 다리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패한 후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정적을 제압한 콘스탄티누스는 오른쪽 측랑의 중앙부에 깊숙한 반원형 공간을 추가하여, 건물의 주축과 교차하는 새로운 축을 만들고, 사크라 길로 통하는 입구를 새로 내는 등 여러 부분을 개조해 독특한 건축물을 완성하였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라 불리기도 했고 새로운 바실리카란 뜻으로 ‘바실리카 노바 Nova’라고도 불리었다. 막센티우스는 바실리카의 내부에 들어선 사람들의 시선이 공간 깊숙이 닿도록 설계했는데, 실제 이를 활용한 사람은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는 사크라 길 쪽 입구로 들어오는 사람의 시선이 닿는 후진(황제들의 광장 가도 쪽에 이 후진을 겉면이 보인다)에 거대한 자신의 대리석 좌상을 세워 실내 분위기를 압도하였다. 이 좌상의 단편들은 1487년 발견되어 지금은 카피톨리노 박물관 뜰에 소장되어 있는데, 머리 길이가 2.6m이고 발 길이가 2m로 좌상의 규모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 바실리카의 지붕은 십자형 볼트 구조라서 중앙부가 둥글게 솟아 있는 모양인데, 그 높이가 35m나 되었다. 전체적인 건축 구조는 매우 명료하고 간결하면서도 놀라운 조화를 이루었다. 콜로세움 쪽에 5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주 입구가 있었고, 사크라 길 쪽에는 3개의 보조 문이 있었다.
9세기의 지진과 1394년 대지진(이 지진은 페트라르카 Petrarca도 언급하였다)으로 건물의 대부분이 무너지고, 지붕을 받치고 있던 높이 14.3m의 원주만 하나 남게 되었다. 이 원주를 1614년 교황 파울루스 5세가 60마리의 말을 동원하여 산타 마리아 마죠레 성당 앞 광장으로 이전하였다. 천장 장식인 도금 청동판을 비롯한 일부 자재들은 626년 교황 호노리우스 1세가 옛 베드로 대성당을 개축하면서 재활용하기 위해 떼어갔다.
현존하는 부분은 북쪽의 작은 복도와 후진, 그리고 그 위를 덮고 있는 궁륭형 천장뿐이다. 이 천장은 브라만테, 라파엘로, 안티니오 다 산 갈로,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시대 건축가들에게 충격을 준 유적으로 브라만테는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하기 전에 이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앞에 남아 있는 거대한 건물 잔해는 플라비우스 시대에 벽돌로 만든 다층 건물 유적인 포르티쿠스 마르 가리 타리에(Poricus다. 1층에는 진주 보석 상점들이 들어 있었고, 위층은 일반 가옥으로 사용되었다. 이 포르티쿠스 유적과 티투스 개선문 사이의 수많은 작은 공간들은 향료와 곡물을 보관하는 창고와 사창가로 이용된 건물들의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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