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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캄피돌리오 언덕 [Campidoglio, Capitolium]

by TES leader 2020.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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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피돌리오 언덕 [Campidoglio, Capitolium]

 

캄피돌리오 언덕은 로마의 언덕들 중에서 가장 낮지만 테베레 강과 티베리나 섬이 내려다보이는 전략적인 위치와 절벽 덕분에 성채 기능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높이 39m에 암석층 지반의 언덕으로 삼면은 급경사인 반면, 북동쪽으로는 퀴리날레 언덕과 연결된 완만한 능선이 있었다. 하지만 트라야 누스 황제가 광장을 조성하면서 이 능선을 없애버렸다. 기원전 390년 켈트 족에 의해 도시가 유린당했을 때에도 이 언덕만큼은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 언덕은 로마 인들에게 사회생활의 장도 아니었고, 권력의 중심부도 아니었으나 종교적, 정치적 의식을 치르는 장소로서 그 상징성이 매우 컸다. 초기 로마 장군들은 승전을 경축하기 위해 적군 포로들을 이 언덕 위로 끌고 올라갔고, 이러한 관행은 로마 사회가 부여하는 최대의 영예인 개선식으로 체계화되었다. 남쪽 봉우리의 좁은 의미의 카피톨리움,즉 현재의 콘세르바토리 궁전 브라초 누오보(Braccio Nuovo) 자리에 들어선 카피톨리노 유피테르 신전(Tempio di Giove Ottimo Massimo Capitolino)이 개선식의 종점이자 로마 인들이 가장 중요시한 성소였다. 이 신전은 기원전 6세기에 타르퀴니아 출신 왕들이 시공하여 509년 첫 콘술들이 축성한 건물로 유피테르와 유노, 미네르바를 함께 모신 신전이라 내실이 3개였다. 초기부터 로마 인들에게 있어서 카피톨리노 삼신 숭배는 가장 중요한 종교의식이었고, 처음에는 로마 식민시들에게만 삼신 전을 세울 권리를 부여했으나, 곧 로마가 정복한 모든 도시들도 확산되었다.

 

북쪽 봉우리인 아륵스(Arx)에는 기원전 344년 독재관 카밀루스가 세운 유노 모네타 신전(Tempio di Giunone Moneta)이 있었는데, 기원전 269년부터 이 신전에서 은화를 발행하였다. ‘경고자라는 뜻의 모네타는 이 신전이 조폐소로 사용됨에 따라 돈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이탈리아어의 모네타, 영어의 머니(MONEY)도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 두 봉우리 사이 구릉지대에 아실룸(Asylum)이 있었다. 아실룸은 사당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이 사당에 인근 도시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피신했기 때문에, 피난처를 뜻하게 되었다. 이곳이 오늘날의 캄피돌리오 광장이 들어서게 되는 언덕의 중앙이다. 사빈 족의 꼬임에 넘어가 언덕을 넘겨줬다가 오히려 이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언덕지기의 딸 타 르페아의 절벽은 서족의 급경사면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사형수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제국 몰락 후 6세기부터 캄피돌리오 언덕은 서서히 방치되기 시작했고, 한때 염소 방목장으로 쓰여 염소 산(Monte Caprino)이라 불리기도 했다. 1143년 자치정부를 세운 시민들이 아실룸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 로마 시대 국가 문서보관소(Tabularium) 건물을 로마 공화국의 원로원 의사당(Palazzo Senatorio)으로 삼으면서 이 언덕은 전기를 맞이했다. 원로원 건물은 시대상황 때문에 협간[골짜기]이 있는 4개의 탑을 구비한 요새형 건물로 변형되었고, 13세기부터 그 옆에 민간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캄피돌리오 광장[Pizza del Campiodoglio]과 궁전들

르네상스 시대에 교황 파울루스 3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언덕 정비 사업을 맡김에 따라 이 언덕은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다. 1536년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건물과 광장은 르네상스 건축의 기본 법칙인 균형, 대칭, 조화가 완벽하게 적용된 것이었다. 그는 기존 구조물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균형이 맞지 않는 창과 회랑, 탑들을 제거하여 원로원 건물을 르네상스식 궁전으로 바꾸고 양옆에 똑같은 모양의 균형이 잘 잡힌 궁전을 배치하여, 마름모꼴의 광장을 만들었다. 물론 캄피돌리오 광장 바닥의 기하학 무늬와 시내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광장 입구의 테라스식 난간 계단도 미켈란젤로가 구상한 것이다. 1538년에 파울루스 3세는 라테란 궁전에 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을 이 광장 중앙에 옮겨놓았다. 현재의 기마상은 복사본이고 원본은 신궁 박물관에 있다.

 

로마 원로원이 사라진 후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는 세나토 리오 궁전[Palazzo Senatorio] 1582년에서 1605년 사이에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와 지롤라모 라이날디[Girolamo Rainaldi]가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일부 변경하여 완성시킨 것으로, 두 건축가는 미네르바 여신상과 1세기 작품인 테베레와 나일 강 조각으로 장식된 분수와 양쪽의 진입 계단도 설치하였다. 궁전 중앙의 카피톨리노 탑은 1582년 마르티노 롱기[Martino Longhi]가 제작한 것이다. 오른쪽의 콘세르바토리 궁전[Palazzo dei Conservatori]은 기존의 민간 건축물을 미켈란젤로의 설계대로 개축한 건물이고, 왼쪽의 신궁[Palazzo Nuovo] 17세기 초반에 늘어날 고대 조각품들을 전시할 목적으로 지롤라모 라이 날디와 카를로 라이 날디 부자가 신축한 건물인데, 이 또한 미켈란젤로의 설계대로 앞 건물과 똑같이 생긴 완전 대칭형의 건물이다. 광장 입구 계단 위에는 로마 제정기의 디오스쿠리(카스토르와 폴룩스 형제의 별칭)상들이 서 있고, 그 옆 테라스 난간 위에 비토리오 엠마누엘 광장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분수에서 옮겨온 승전 기념물이 놓여 있다.

 

공중에서 본 광장은 석상들의 배치나 건물들의 볼륨감, 마름모꼴 광장의 기하학적 디자인 등 여러 면에서 건축가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확인하게 한다. 이 언덕의 고대 유적들이 로마 광장을 비롯한 다른 언덕들을 쳐다보는 형국이었던 반면, 현재의 건물들은 강과 평원을 향해 나 있는데, 이는 로마 시의 중심축이 이동하였음을 의미한다.

 

 

산타 마리아 인 아라코엘리[Santa Maria in Aracoeli] _천국 제단의 성모 마리아 성당

아라코엘리(천국 제단) 광장 앞 가파른 122개 계단 위에 자리 잡은 이 중세 기원의 교회는 처음에 베네딕트 교단 소속이었고, 후에 프란체스코 수도원 교단에 속하게 되었다.

천국 제단이란 이름이 붙은 경위는 다음과 같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 이를 예고하는 징조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나타났는데, 바로 그 장소가 캄피돌리오 언덕의 유노 모네나 신전 위였다.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구름 사이로 무릎 위에 아기를 안은 한 예쁜 여인이 제단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나타나자, 아우구스투스는 오 주의 아들 제단이여!’하고 탄성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 기적을 기억하기 위해 베네딕트 교단 수사들이 1200년 기적이 일어난 유노 모네타 신전 자리에 교회를 세우고 천국 제단의 성모 마리아 성당라 이름지었다. 이 교회로 오르는 계단은 1291년에 설치되어 흑사병을 물리친 데 대한 감사 표시로 성처녀에게 봉헌되었다.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듯이 가파른 이 계단은 바로 옆에 있는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올라가는 르네상스 시대의 완만한 계단과 아주 대조적이다.

13세기에 벽돌로 세운 이 교회의 정면은 매우 단순하다. 바실리카 양식의 내부는 13세기 이래 로마 미술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천장은 1575년에 장식된 것이며, 주제단 위에는 10~11세기 작품인 성모와 아기 예수 프레스코화가 있다. 성물실에는 감사 봉헌물로 덮인 15세기의 아기 예수 상이 있었는데, 성탄절 때마다 교회 왼쪽 복도 두 번째 예배당에 설치된 마구간에 옮겨져 경배 시간을 가졌으나, 1994 2월 도둑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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