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티노 언덕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 4월 21일 로물루스가 테베라 강이 굽이 보이는 이 언덕 위에 정사각형의 경계선(Pomerium)을 긋고 도시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20세기 초에 케르말루스 능선에서 기원전 9세기 말에서 7세기 초의 것으로 보이는 움막집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전설상의 로물루스의 집과 위치가 일치하는 점으로 보아 이 마을이 로물루스 당시의 로마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이를 증명할 만한 역사적 증거는 전혀 없다. 또한 기원전 6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 흔적들과 기원전 4세기 성벽 유적이 발견되었다. 사실 로마 창건 신화는 기원전 3세기경에야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건국 연대도 작가마다 달랐는데, 기원전 1세기에 소小 카토(M.Porcius Cato)(기원전 95~46년)가 주장한 기원전 753년이 정설로 자리 잡았다.
학자들은 로물루스 전설과 별개로 이 언덕에서 남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알바롱가 언덕에서 이주해온 프리스쿠스 라 티누스 일파가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로마 시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지역은 테베레 강 북쪽의 에트루리아 인들과 남쪽의 라인 인들이 접촉하는 경계 지점이었고, 에트루리아 왕들의 등장도 지리적 조건과 관계가 있었다. 언덕 이름의 기원은 불확실하나, 팔레스(Pales), 팔라투아팔 라투아(Palatua), 팔릴리아(Palilia) 같은 목축을 의미하는 용어와 관련이 있다.
팔라티노 언덕에는 세 개의 능선, 곧 황궁(Domus Augustana)이 들어선 팔라티움과 소위 리비아 집(그 안에서 발견된 수도관에 아우구스투스의 처 리비아를 가리키는 문구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이 있는 케르말루스(Cermalus), 그리고 로마 광장이 확장되면서 잘린 벨리아(Velia) 능선이 있었는데, 앞의 두 능선이 초기의 언덕 도시를 이루었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도 셋으로 현재 티투스 개선문 자리에 있었던 무고니아 문을 통해 오르는 길과 테베레 강 쪽에서 로마 눌라 문을 연결해 노바 길로 올라가는 길이 북쪽 길이었고, 대전차 경기장 쪽에서 오르는 카쿠스 계단(Scalae caci) 길이 가장 짧은 남쪽 길이었다. 카쿠스 길은 거인 카 쿠스가 헤라클레스의 양들을 훔쳤다가 살해당 안 곳이라는 전설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초기 유적들로는 리비아 집 근처의 고졸기 무덤, 집안의 원형 수조와 우물, 루페르칼레에 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신에게 바쳐진 제단이 있다. 루페르칼레는 테베레 강 쪽으로 나 있는 동굴로, 안에는 루페르쿠스 샘(Faunus Lupercus)이 있었는데, 이 샘 옆에 창건 신화에 등장하는 쌍둥이를 담은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공화정 시대에 팔라티노 언덕에는 승리의 유피테르 신전과 대모신 키벨레 신전(Tempio di Cibele Magna Mater)이 들어섰고,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저택과 아폴로 신전, 베스타 신전을 세웠다. 도한 공화정 말기 2세기 동안 부유한 귀족들이 건축 붐을 일으켰던 곳이 팔라티노 언덕이다. 키케로의 집과 그의 동생 퀸투스의 집, 킴브리 족에게서 빼앗은 승전 기념물로 장식한 회랑으로 유명한 카툴루스의 집, 술라, 스카우루스, 연설가 리키니우스 그라 수스의 집은 물론이고,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난 옥타비우스(Octavius) 가문의 저택도 이 언덕에 있었다. 악티움 해전에서 패해 몰락한 안토니우스의 집은 아그리파에게 넘어갔다.
팔라티노 언덕이 출생지이기도 한 아우구스투스는 로물루스의 집터로 알려진 연설가 호르텐시우스의 집을 구입한 후 회랑을 추가로 설치하였는데(Casa di Augusto), 학자들은 이곳이 로물루스의 ㅈ비터가 아니라 로물루스가 세웠다는 옛 원로원(Curiae veteres)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 저택은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이 구분된 직사각형 구조의 건물이었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확인된 첫 궁전은 티베리우스가 세운 티베리우스 궁전(Domus Tiberiana)으로 후임 황제 카리굴라가 로마 광장 쪽에 현관 건물을 추가시켜 궁전을 확장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파르네제 가문의 알레산드로 추기경(교황 파울루스 3세)이 티베리우스 궁전 자리에 별장을 조성하여 이 궁전은 두 채의 새장(Uccelleria)과 계단, 분수로 꾸며진 테라스 정원으로 바뀌었고,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뒤의 현관 건물은 마찬가지로 유적이 되어버린 산타 마리아 안티쿠아 교회에 에 자리를 내주었다. 티베리우스 궁전은 아직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네로가 60년에 지은 트란시토리아 궁전(Domus Transtoria)은 64년 화재로 인해 파괴되었고, 플라비우스 왕조를 세운 베스파시아누스가 그 자리 위에 플라비우스 궁전(Domus Flavia)을 세워 자신의 궁전으로 삼았다. 이 궁전은 현재의 팔라티노 유물 전시관(Antiquario Palatino) 건물 오른쪽에 위치한 직사각형 구조의 건물군이었는데, 앞부분에 재판소와 중앙홀, 라라리움(Lararium, 가장 보호신 라레스 Lares 사당)이 있었고, 박물관 건물의 오른쪽 모퉁이를 포함한 뒷부분에 와석 식당(triclunium)이 있었다. 팔각형의 바닥 유적은 이 궁전의 안뜰에 조성한 팔각 정원 자리이다.
한편, 이 궁전의 라라 리움 지하에서 기원전 2세기 때의 가옥이 발견되었다. 기다란 코 모양의 문양으로 장식된 방이 있어서 소위 ‘그리피(Grifi)의 집’이라 불리는 이 가옥은 기원전 1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벽 장식들이 2기 회화양식(미술사가들이 폼페이 유적지의 벽화들을 4기로 구분하였는데, 2기 작품들은 원근법을 사용해 극장 무대 같은 효과를 냈다)의 전형이기 때문에 유명하다. 이 벽 장식들은 현재 대부분 유물 전시관 벽에 전시되어 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도미티아누스가 81년 건축가 라비리우스(Rabirius)에게 플라비우스 궁전을 확장시키는 공사를 지시해 11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92년에 황궁이 완성되었다. 황궁 건물은 기능 면에서 집무 및 공공행사를 수행하는 공용 공간과, 황실 저택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플라비우스 궁전 건물과 지금은 풀밭으로 남아 있는 박물관 앞 왼쪽의 공간이 공용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뒤쪽 언덕의 비탈면을 깎아서 황실 저택은 거대한 주랑 현관으로 이루어진 건물의 정면과 입구가 대전차 경기장 쪽으로 나 있었다. 저택의 중앙에는 2층의 열주 회랑으로 된 사각형의 중앙 정원이 있었는데, 이 정원은 4개의 방패(Peltae, 아마존 여인들이 썼다는 전설상의 방패) 무늬가 있는 연못이 있었다. 정원 주위에는 거대한 홀과 크고 작은 방들, 반원형 벽감, 분수 등이 있었으며, 위층으로 통하는 계단 주변에는 작은 부속 공간들이 딸려 있었다. 계단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당시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마치 로마의 일곱 언덕을 쌓아 하늘에 맞닿게 한 듯한 거대한 규모의 건축이라고 묘사하였다. 이후 사람들은 황궁을 팔라티노 언덕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하여 팔 라티움(Palatium)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오늘날 ‘궁전’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팔라쪼(Palazzo)나 영어 팰리스(Palace)의 어원이 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황궁의 동쪽에 목욕장과 전차 경기장 모양의 체육시설도 조성하였다. 2층 구조의 이 경기장은 길이가 88m였고, 짧은 변의 한쪽은 반원형으로 되어 있었다. 아래층은 아치형 벽돌 구조물로 표면을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있었고, 상부의 하중을 받는 부분에는 반원주가 덧붙여졌다. 긴 변의 중앙부에는 층을 더 높여서 웅대한 특별석을 설치했고, 경기장에는 낮은 담장으로 중앙 분리대를 세웠으며, 담장의 양쪽 끝에는 타원형의 분수를 만들어놓았다. 몇 세기 후, 경기장의 남쪽 부분에 타원형의 담장이 둘러쳐졌는데, 이곳은 말을 길들이던 터로 여겨진다.
황궁이 세워진 지 100년 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대전차 경기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남서쪽 비탈면에 아치 공법으로 벽돌 축대를 세워 거대한 테라스를 만든 다음 확보한 공간을 이용하여 목욕장을 갖춘 별궁 건물을 지었다. 그 결과 황궁의 끝이 경기장의 관중석 가까이 다다를 정도였으며, 높이가 30m 가까이 되었다. 이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는 아치형의 벽돌 구조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세베루스는 아피아 가도가 시작되는 언덕 비탈면에 4열의 열주 회랑 건물 셉티조디움을 세우고 화려한 원주와 조각품, 분수로 장식했다. 하지만 이 셉티조디움 건물은 16세기에 교황 식스투스 5세가 대규모 건축 사업에 필요한 자재들을 확보하기 위해 해체함으로써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이 남긴 그림에서나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황실 저택의 테라스 아래에 회랑식 벽돌 건물 유적이 보인다. 이 건물도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지어진 황실 부속 건물로 두 줄의 방들로 이루어진 황실 노예들의 학교, 테다고기움(Paedagogium)이다. 이 유적의 기단에는 낙서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알렉사 메노스가 (자기) 신에게 경배한다.’는 문구 옆에 한 남자가 당나귀 머리를 한 신이 매달린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못브을 그려놓은 낙서가 매우 인상적이다.
한편 네로의 트란시 토리아 궁전 유적 옆에서 물을 보관하는 원형 저수조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6세기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언덕에 수로 물이 들어오게 된 것은 52년 클라우디스 수로가 건설된 후였는데, 황궁이 이 언덕에 자리 잡으면서 물 공급 체계가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황궁은 로마가 몰락한 후 오도아케르와 데 오도릭 같은 고트 족 왕들이 접수해 사용했으나, 뒤이은 혼란기에 방치되었고, 중세 말기에 들어 벨리아 전체와 팔 라티움 대부분을 차지한 프란 지파네 요새에 포함되었다. 이후 16세기까지 이 언덕은 역사에 언급되지 않다가 르네상스 문서들에 팔라쪼 마죠레(Palazzo Maggiore, 다궁전)란 이름으로 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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