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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라테란 교황청, 천년의 역사

by TES leader 2021.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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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테란 교황청 천 년의 역사

 

 

라테란 교황청

크리스트교가 공인된 후 로마 주교 공관, 곧 교황청이 들어선 곳은 강 건너 바티칸이 아니라 첼리오 언덕 뒤쪽의 라테란 지역이었다. 요한 대성당과 주교 공관이 자리 잡게 되는 이 지역의 명칭은 라테 라누스 가문의 소유지에서 유래하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라테라누스 가문 출신의 둘째 부인의 궁전을 성당에 공관으로 기부했다. 이 가문에 대해서는 65년 원로원 의원 섹스투스 라테라누스[Sextus Lateranus]가 네로 황제를 제거하려는 피소의 역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되고 그의 저택은 몰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라테란 지역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바로 안에 있기 때문에 시내 중심에 있던 이교도 사회와 직접 부딪치지 않는 이점이 있었고, 크리스트교 사회가 완전히 자리 잡은 이후에는 콜로세움 앞으로 도로가 뚫려 시내와 직접 연결되었으므로 지리적으로도 불편함이 없어졌다. 라테란은 이후 1,000년동안 로마 가톨릭 성당의 본산 역할과 제국 멸망 후 극도로 쇠퇴한 로마 시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라테란 교황청은 1305년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 갈 때까지 교황의 공식 궁전이었으며, 보니파키우스 8세는 1300년 이 궁전 축복 회랑(Loggia delle Benedizioni)에서 첫 성년(iubileo)을 선포하였다. 아비뇽 유수가 끝났을 때, 교황이 유수 기간에 발생한 화재로 파괴된 이 궁전 대신 바티칸으로 거주자를 옮김에 따라 라테란 교황청은 1,000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오늘날의 라테란 궁전(Palazzo Lateranense)은 식스투스 5세의 재건축 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 것인데, 1586~1589년 도메니코 폰타나가 고대 유적에서 뽑아낸 대리석과 석재를 사용해서 총 대주교청(Patruarchio)자리에 세운 건물이다. 병원을 보유한 이 궁전은 19세기에 박물관으로 사용되었으나 박물관은 바티칸으로 이전되었으며, 1929년에는 교황청과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가 역사적인 라테란 협정을 체결한 곳이다. 그 후 1967년부터 로마 주교청(Vicariato di Roma)이 자리잡아, 로마 주교인 교황을 대신해 교황이 임명한 추기경이 관리하고 있다. 치외 영토권을 보유한 이 궁전에는 현재 교황령의 역사를 기록한 문서 보관소 겸 역사박물관이 있는데, 1993년 폭탄 폭발 사고로 정문이 손상을 입었다.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광장 중앙에는 높이가 47m, 현재 로마에 있는 오벨리스크들 중 가장 높고 오래된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투트모스 2세가 기원전 15세기에 테베의 암몬 신전 앞에 세웠던 것을 357년 콘스탄티누스 2세가 로마로 옮겨 와 대전차 경기장 분리대에 세웠는데, 중세 초기에 지진으로 무너져버렸다가 1587년 발견되어 다음 해에 지금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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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열쇠와 성당 국가

마태복음 16 18~19절을 근거로 성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권력을 위임 받았고, 그 후계자인 로마 주교가 성당의 수장이 된다는 설에 따라 로마 주교가 교황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고고학 증거들이나 문헌 증거들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해 현재의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매장되었다는 전설이 사실임을 보여주는데, 이는 그가 로마 성당의 첫 지도자였음을 의미한다.

96년경 교황 클레멘트 1세가 로마 크리스트교도의 이름으로 코린트의 크리스트교도들에게 보낸 서한이 로마 성당이 다른 성당들에 대해 지도권을 주장한 첫 시도로 볼 수 있으며, 2세기 말에 로마 주교 빅토르 1세가 서머나 주교 폴리캅과 부활절 날짜 논쟁을 벌이면서 소아시아 성당들을 파문한 사례가 있다. 하지만 3세기 중반 이전에는 사실 로마 성당의 지도적 지위를 강조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형제였고, 로마 성당이 이들 중 맏형으로 여겨졌다.

257년 로마 주교 스테파누스와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안이 이단에 빠진 교인의 재 입교 절차에 대해 견해차를 보였을 때, 로마 주교가 마태복음의 구절을 인용하여 로마 주교의 우위를 강조함에 따라 수장권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를 동방 크리스트교 세계의 수장이며 로마 주교 다음가는 지위라고 선포함으로써 일단락이 지어졌다.

마침내 로마 주교의 수장권, 곧 교황권은 레오 1(440~461) 시대에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 레오 1세는 교황이 베드로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법적 후계자라는 믿음을 몸소 보여주었고, 451년 칼케도니아 종교회의도 교황의 교서를 베드로의 권위에 입각한 것으로 인정하여 교황권은 일시적인 권력이 아니라 제도적인 권력으로 자리 잡았다.

만족의 침입과 제국의 몰락, 고트 족 왕국의 등장이 로마 시를 치명적인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니었다. 로마문명의 맛을 본 주변 종족들은 로마 제국이 남긴 구조를 파괴하는 쪽이 아니라 수용하는 쪽을 택하였다. 오히려 이탈리아와 로마 시, 특히 교황청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은 이탈리아에 자리 잡은 고트 족 왕국과 고토를 회복하려는 비잔틴 제국의 갈등이었다. 535년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재정복 전쟁을 개시해 이탈리아를 전쟁터로 만들었고, 552년 로마 시를 라벤나 총독의 관할구역에 편입시켜버렸다. 재정복 시기의 로마 교황들은 그동안 누렸던 자유를 박탈당하고 유스티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비의 종교정책에 끌려다니는 치욕을 맛보았다.

실지 회복 전쟁으로 전쟁 당사자인 두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568년 롱고 바르디 족이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손쉽게 차지하여 롬바르디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중북부 아펜니노 산맥에 자리 잡은 롬바르디아 왕국은 로마에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했지만, 라벤나 총독령과 로마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비잔틴의 직접적인 지배를 차단해주기도 했다. 590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90~604)는 로마 시를 포위한 롱고 바르디 족을 퇴각시켜 로마 시와 주변 지역에 대한 세속 권력을 확보했다.

8세기에 들어 비잔틴 제국에서 성상파괴 운동(Iconoclastia)이 발생하자, 이를 비판한 교황청은 비잔틴 편을 든 롬바르디아 왕국과 대립하였고, 교황 스테파누스 2(752~757)는 롬바르디아 왕국과 경쟁관계에 있던 프랑크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프랑크 왕 피핀과 뒤이어 그의 아들 샤를마뉴는 롬바르디아 왕국을 물리친 후 정복한 땅을 교황청에 양도하고,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교황청이 완전히 독립할 수 있게 해 주었다.이로써 교황청은 이탈리아 땅의 2/3를 차지하는 교황령 국가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800년에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에게 신성로마 제국의 제관을 씌워주어, 이에 보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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