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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교황청의 위기, 아비뇽 유수 그리고 대분열

by TES leader 2021.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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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에 위치한 교황의 궁전

교황파와 황제파

12세기에 들어 로마 시는 시민들의 자치정부를 세우려는 인민파와 교황청의 지원을 받는 귀족 세력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독일 황제를 지지하는 황제파(Ghivellini)와 교황을 지지하는 교황파(Guelfi)가 반목하는 상황이 한꺼번에 전개되면서 미묘하고 복잡한 상황에 처했다. 자치정부 운동, 소위 코무네[Comune] 운동은 중세 사회가 나름대로 안정을 찾고 도시기능과 경제활동이 회복되면서 도시 상층민들이 정치적 권리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었는데, 교황청이 자리 잡고 있어서 비교적 빨리 회복세를 보이고 고대 로마의 전통이 사라지지 않은 로마 시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성직자들의 타락과 탐욕을 질타하고 교회가 세속사에서 손을 떼고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치 종교 개혁의 기치를 건 브레샤 출신의 수도사 아르날도[Arnaldo da Brescia]가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1144년 자치 정부를 구성하고 교황을 추방시켰으나, 1152년 제위를 오른 호엔 슈 타우펜가의 프리드리히 1세의 간섭으로 새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가 세력을 회복함으로써 1155년 와해되고 말았다. 자치정부 운동은 본질적으로 반외세, 반교황청 성격을 지녀 독일 황제나 교황의 탄압 대상이었으나, 황제와 교황의 관계, 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로마 귀족들이 변수로 작용하였다. 뒤를 이어 교황의 보호하에 선출된 원로원 의원이 이끄는 공화국이 세워졌으나, 세력들 간의 갈등은 지속되었고, 인근 도시들과의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지배 정책을 편 프리드리히 1세와 아들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한 후 독일 제후들이 제권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사이에 교황령 국가는 세력을 회복하기 시작해 1200년경에는 영토가 북쪽으로는 포 강 유역에 도달했고, 남쪽으로는 시칠리아에 대한 황제의 지배력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220년 프리드리히 1세의 손자 프리드리히 2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교황권은 다시 약해졌고,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을 때까지 30년 동안 이탈리아 전역에서 교황파와 황제파 사이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보니파키우스 8세와 성년

대공 위기(1254~1273년)를 걸쳐 신성로마 제국이 독일 제후국들의 동맹체 성격을 띠게 되고 황제의 권력도 명목상으로만 남아 있게 됨에 따라 이탈리아와 교황령에 대한 관심이 약해져, 교황령 국가는 세속권력에 대한 교권의 우위 정책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경제위기에 처한 프랑스 왕 필립 4세가 자국 내의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면서, 교황령 국가는 새로운 세속권력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게다가 이번 상대는 이탈리아 지배를 꿈꾸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자국의 이해에 철두철미한 프랑스의 세속 군주였고,교황 또한 정권욕이 아주 강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다.

1296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1294~1303)가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세속 관리는 물론이고 세금을 내는 성직자도 파문한다고 선언하자, 프랑스 왕은 돈과 귀금속의 유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해 교황청의 재정을 압박하고 성직자와 귀족과 도시 중산층 대표들을 소집하여 프랑스 성직자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보니파키우스 8세가 1300년 첫 성년(Giubileo)으로 선포한 이유는 프랑스 왕의 강공책에 맞서서 교황의 세력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모든 순례자에게 완전하고 특별한 면죄를 약속하는 교황의 말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해, 각지에서 몰려든 순례자들 때문에 성 천사의 다리에 분리대를 설치해 교통정리를 해야 할 정도였다. 이에 힘입은 보니파키우스 8세가 1302년 세속권력에 대한 교황의 우위를 천명하고 필립 4세를 파문하자 프랑스 군이 로마로 진군하여 교황을 사로잡아 구금하였다. 교황은 프랑스로 끌려가는 것은 간신히 피했으나 절망 상태에서 곧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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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유수(1309~1377)와 대분열(1378~1417)

1304년 후임 교황이 1년도 안 되어 사망하자, 추기경들이 친프랑스파와 반프랑스파로 갈려 거의 1년 동안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마침내 필립 4세는 친프랑스파 추기경들의 지원에 힘입어 보르도 대주교를 최초의 프랑스 인 교황으로 올려놓는데, 이 교황이 1309년 프랑스 왕 필립 4세의 압력하에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이전한 클레멘트 5세이다.

병약한 데다 타락한 인물인 클레멘트는 9명의 프랑스 인과 영국인 1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해 향후 프랑스 인들의 교황청 지배력을 강화시켰고, 프랑스 왕의 주문대로 신전 기사단을 탄압하고 기사단의 재산을 빼앗은 도구 역할을 충실히 했다. 후임 교황 요한 22세도 프랑스 인으로 전임자 못지않은 정실 인사와 혹독한 재정 정책, 프란체스코 파와의 갈등으로, 특히 수도사들 일부를 화형에 처해 극도의 불만을 야기했다.

1367년 프랑스 궁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르바누스 5세가 황제 카알 4세의 압력과 브리지타 성녀의 권유로 로마행을 결정하였는데, “성하, 집들이 무너지고 성벽과 성당들도 쓰러져갑니다. 성물들도 사라져버리고 법도 정의도 없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당신의 이름을 불러대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성스러운 연인의 눈물이 보이지 않습니까?”라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의 편지도 이에 한몫을 했다.

그러나 불타버린 라테란 궁전 대신 임시로 바티칸에 자리 잡은 교황은 주거환경과 치안 상태에 대한 불만으로 1370년 아비뇽으로 다시 돌아갔다. 마침내 브리지타 성녀의 지속적인 탄원과 감화된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1377년 로마 귀환을 강행하여 바티칸 궁전에 자리잡음으로써 78년간의 교황청 유수가 종식되었다. 그러나 교황의 귀환에 반발한 아비뇽에서 전례가 없지 않은 반 교황을 계속 선출함에 따라 1417년 콘스탄트 종교회의에서 마르티누스 5세를 선출할 때까지 교권분열 상태가 지속되었다. 아비뇽 유수기와 성당 대분열 상태에서 로마 시는 끊임없는 소요와 경제 쇠퇴로 절망 상태로 빠졌다. 빈곤이 얼마나 심했던지 1414년 베드로와 바울 축일 미사에는 촛불도 켜지 못했다고 한다. 선출된 지 3년 만인 1420년 마르티누스 5세가 피폐해진 로마 시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바티칸 교황청 시대가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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