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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진실의 입) / 서임권 투쟁

by TES leader 2021.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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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과 진실의 입 광장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이현관 벽에 붙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틴(Santa Maria in Cosmedin)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성상파괴 운동과 관계가 있는 유일한 로마 성당이다. 비잔틴 제국에서 성상파괴운동이 발생하자 박해를 피해 로마로 도망쳐 온 그리스 인들이 이 성당 주변 지역에 자리 잡게 되었고,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가 이 성당을 개축 확장한 후 그리스 인들에게 양도하게 된다. 이 교황은 2차 니케아 종교회의(787)를 주도하여 성상파괴운동을 종식시킨 인물이다. 그리스 인들은 성당 내부를 그리스어 코스미 디온(Kosmidion)(장식)이라는 말에 걸맞을 정도로 비잔틴 풍으로 장식해, 이로부터 코스메딘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었고, 이후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져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원래 이 성당은 로마 시대에 티베리누스 포구(Portunus Tiverinus)의 곡물창고로 사용되었던 열주 회랑의 출구를 막고 벽을 세워 6세기 전반에 건축한 성당으로, 정면 입구에 있는 원주 7개와 왼쪽 복도의 원주 3개는 1세기 건물에서 옮겨다 재활용한 것이다. 개축 과정을 거치면서 본래의 6세기 건물이 내부에 포함되어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7층의 사각 종탑은 아치 기둥의 배열이 볼 만한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성당 현관 왼쪽 벽에 붙어 있는 진실의 입은 강의 신의 얼굴이 부조된 둥근돌 판으로 승리의 헤라클레스 신전 가운데에 있던 하수구 마개이다. 로마 시대 신전들은 제물 제사를 드리는 성소라서 공공건물과 도로 담당관인 에딜레스가 책임지고 물청소를 해야 했기 때문에 하수구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거짓말하는 자의 손가락을 자르는 신비한 힘이 있다는 전설은 베르길리우스의 시를 근거로 생겨났는데, 중세 시대에는 귀족들이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로 이용하기도 했다.

성당 앞 진실의 입 광장은 로마 시대에 보아리오 광장(Forum Boarium)이라 불리던 곳이다. 이 광장은 티베리나 섬의 동쪽 강변의 위치하는데, 로마가 도시로서의 골격이 갖추어지기 이전부터 주변에 살던 라틴, 사빈, 에트루리아 인들이 교역하던 곳이었다. 이후 로마 시가 발전하면서, 광장 앞 포구가 테베레 강 하구의 오스티아[Ostia] 항구로부터 올라온 배들의 선착장이 되자, 광장은 곡물, 올리브기름, 포도주 등을 하역하는 곳이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이 광장과 현재 시청 계단 아래의 올리토리오 광장에 가축, 기름, 채소 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보아리오는 가축이란 뜻이고, 올리토리오는 채소란 뜻이다.

이 지역이 항구의 기능을 갖게 되자, 올리토리오 광장에 항구의 신 포르투누스 [Portunus]신전이 세워졌다. 이 신전은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이오니아식 직사각형 신전으로 건축되어 1세기에 일부 개축되었으며, 9세기에 산타 마리아 에지티아카[Santa Maria Egittiaca] 성당으로 용도가 바뀐 덕택에 파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이 신전은 보통 포르투나 비릴레[Fortuna virile(남성 행운)] 신전이라고 불리는데, 포르투누스가 포르투나로 와전되어 생긴 잘못된 이름이다.

그 옆에 서 있는 코린트식의 원형 신전은 모양이 포로 로마노에 있는 베스타 신전과 비슷해 보통 베스타 신전(Tempio di Vesta)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승리의 헤라클레스(Ercole Vincitore) 신전으로, 기원전 2세기 말에 세워졌으며 티베리우스 시대에 복구되었음이 최근 발견된 비문에서 밝혀졌다. 로마 인들은 이 신전의 모양이 철기 시대 초 이탈리아 원형 움막집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리스의 톨로스형 신전을 연상시키지만 대들보가 없는 게 특색이다.

교황 클레멘트 11세의 지시로 1715년 카를로 비쪼케리[Carlo Bizocheri]가 제작한 바로크식의 트리톤 분수는 암초 위에 무릎 꿇은 트리톤 둘이 수반을 들고 있는 모습인데, 바르베리니 광장의 베르니니 분수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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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와 개혁, 서임권 투쟁

교황령 국가와 프랑크 왕국의 밀월관계가 프랑크 왕국의 내부 분열로 깨어져버린 뒤 교황의 위상이 약해지자 로마 귀족들과 움브리아, 라치오 봉건영주들이 교황령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962년에는 이탈리아 원정에 나선 독일 왕 오토 1세가 로마를 함락시킨 후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제관을 받아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교황령 국가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때부터 독일 황제의 간섭 하에 프란 지파니 [Fangipani] 가와 피에르 레오네[Pierleone]가,오르시니[Orsini], 콜론가[Colonna]가와 같은 로마 시 귀족 가문들이 교황 자리를 독점하기 시작했다. 이 가문들은 시내에 요새를 설치하여 도시를 지배하기 위한 거점으로 삼았는데, 이 과정에서 고대 건물들도 서슴없이 개조하였다. 교황들은 귀족들의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심지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문란한 인물도 있었다.

1048년 독일 황제 하인리히 3세의 사촌 브루노가 레오 9세 교황으로 취임하면서 성당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는 클루니 수도원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는데,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결혼은 금지하고, 로마 성당 행정부를 유럽 각지에서 모인 인재들로 채웠다. 1059년 라테란 종교회의에서 니콜라스 2세가 추기경들이 교황을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하여 이때부터 로마 귀족들은 교황 선출 활동에서 배제되었다. 이 시기에 교황청은 통치 기구인 쿠리아 조직을 보유한 성당 군주국 형태를 취하게 된다.

특히 그레고리우스 7(1073~1085) 1075년 로마 종교회의에서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고 세속권력이 성직자를 임명하던 관행을 금지시켜 독일 황제의 세속권력과 정면충돌하였는데,이로부터 파생한 갈등 국면을 서임권 투쟁이라 한다.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이에 맞서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는 강수를 두었고, 독일 제후들이 이를 빌미로 황제에게 반기를 들어 궁지에 몰린 하인리히는 1077년 카노사 성 밖에서 3일 동안 빌고서야 파문을 철회시킬 수 있었다.

소위 카노사의 굴욕 이후 스베비아의 루돌프가 제권을 잡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그를 지지한 교황이 황제를 다시 파문하자, 황제는 반反 교황을 임명해 맞대응하고 신속히 루돌프를 제압한 후 1084년 로마 시를 점령하였다. 수세에 몰린 교황은 남부 이탈리아에 자리 잡은 노르만 족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로베르토 구이스카르도 휘하의 노르만 족이 로마로 진군하여 교황을 구원했으나, 도시를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러 시민들을 격분시켰다. 이 사태에 당황한 교황은 살레르노로 피신했고, 다음 해에 그곳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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