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티칸 교황청 시대
■ 로마 시의 부흥과 공공 건축사업
1377년 로마로 돌아온 교황청은 화재 피해를 입은 후 방치된 라테란 궁전 대신 바티칸 궁전에 자리를 잡았다. 교황청이 좀 더 통제력이 강하고 방어상 이점이 있는 바티칸을 영구 거점으로 삼은 것은 시의 적절했다. 바티칸은 쉽게 요새화를 할 수 있는 언덕이 있는 데다 테베레 강과 아주 가까워 시내 중심이 바로 내려다보였고, 천사의 성이 가까이 있어 비상시에 피신하기도 좋았다. 게다가 크리스트교 공인 이후 순교지에 성당을 세우는 전통에 따라 베드르 대성당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궁전들이 들어설 부지도 충분했다.
15세기 교황청의 부흥은 100여 년에 걸친 혼란으로 쇠퇴를 거듭한 로마 시와 교황청 국가를 재건하면서 이루어졌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로마 시에 있어서는 초기 르네상스 시대였고, 도시와 상업의 부활에 힘입어 이탈리아 도시들에 처음 나타난 새로운 시대 분위기가 회복 단계의 로마와 교황청에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 중심의 사고와 행동을 요구했고, 교황들의 의식과 행동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들은 새로운 시대사고를 수용하는 이탈리아 군주들처럼 행동했고, 이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심한 경우에는 종교적 소명을 잃어버리고 부패와 타락의 길로 들어서서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예술,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에 교황들은 이탈리아 정치무대에서 세속 정책을 추구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이러한 정책은 절대주의 시대에까지 지속되어 세속 국가들과 교황령 국가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교황청의 정치적 위상은 복잡한 국제 정세에 따라 기복이 심했고, 종교적 위상도 인간 중심의 사고와 각국의 이해관계가 작용해 신정주의(=신권주의: 지배자가 자기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여 인민의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정치)가 통하던 중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에 교황청이 돌아오면서 로마 시에 주어진 가장 큰 혜택은 경제적 활력이었다. 경제력 회복은 공공사업과 관광사업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동안 방치되었던 성당과 공공건물들의 개축과 보수 및 신축 사업이 기술인력과 예술가들을 끌어들이면서 정 주지 확장을 촉진했다. 이 밖에도 순례자들의 증가로 숙박업, 성물 제조 및 판매와 관련된 수공업, 상업활동이 활발해졌다. 교황청의 수주 공사와 물품 공급은 중요한 이권 사업이라 교황 궁전은 각지에서 몰려든 사업가들로 들끓었다.
교황청이 우선적으로 추진한 사업들 중 하나가 로마 성지순례 코스를 단장하는 것이었다. 플라미니아 가도를 통해 시내에 들어온 순례자들이 바티칸으로 가기 위해서는 포폴로 광장에서 현재 아우구스투스 영묘가 있는 강변으로 접어들어야 했으므로 리페 따 길(Via di Ripetta)을 닦고 코르소 길과 주변 지역을 정돈하고 강변로를 정리하는 사업이 추진되었고, 반대쪽 아피아 가도와 오스티엔세 가도를 타고 들어오는 순례자들을 위해 줄리아 길(Via Giulia)을, 그리고 트라스테베레와 바티칸을 연결하는 룽가 라 길(Via della Lungara)을 새로 뚫게 되었다.
■ 코르소 길
로마 시대에 플라미니아 가도의 시작 부분으로 네로의 가문 무덤과 장례 기념물들, 아우구스투스의 영묘와 화장터, 평화의 제단, 기념 원주, 개선문 등 다양한 유적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코르소 거리. ㄱ지금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념 원주를 제외하고는 제자리에 남아 있는 고대 유적이 전혀 없다. 16세기 초 이 길의 정비사업을 맡은 라파엘로가 교황에게 유적 보존을 간청했는데도, 태양신전 유적과 그 밖의 기념물들이 땅속에 묻혔고 다음 세기에는 마지막 개선문도 사라져 버렸다.
중세에 시골길로 변해버렸던 코르소 길(Via del Corso)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옛날의 영화를 회복하게 된다. 포폴로 광장 옆 리페 따 포구의 중요성이 커진 데다 리페따 길이 새로 났고, 교황들이 도로변의 텃밭들과 가옥들을 철거하고 큰 궁전들을 짓도록 허용하여 건축 붐이 일었다. 특히 코르소 길과 퀴리날레 광장을 연결하는 길을 강변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이었으므로, 중세 시대에도 비교적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따라서 이 길과 베네치아 광장 사이에 귀족 궁전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사도들의 고아장(Piazza dei santissimi Apostoli)을 둘러싼 콜론나 궁전과 오 데스 칼키 궁전, 발레스트라 궁전이다. 콜론나 가문은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묶여 매질을 당한 원주를 로마로 가져온 십자군 병사를 시조로 하는데, 15세기 초 마르티누스 5세를 배출할 정도로 그 세력이 커져, 세기 후반에는 가문의 위상에 걸맞은 궁전을 지었고, 궁전 뒤쪽에 별장도 지었다. 트레비 분수와 만나는 필로타 길의 작은 아치들은 이 궁전과 뒤쪽의 콜론나 별장을 연결하는 통로들이다. 맞은편의 오 데스 칼키 궁전은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후손인 헨리 추기경이 망명해 살았던 곳이다.
코로소 길 건너편 베네치아 광장과 만나는 모서리에 나폴레옹의 모친 레티 찌아 라 몰리노 보나파르테가 1836년 죽을 때까지 살았던 보니파르테 궁전도 17세기에 건축되었고, 그 옆의 도리아 궁전도 같은 시기에 제노바 출신의 도리아 가문이 세운 것인데, 면적이 콜로세움의 2/3 정도로 로마 시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궁전이다.
코르소 길가에 들어선 가장 유명한 궁전은 베네치아 궁전(Palazzo Venezia)이다. 현재 베네치아 광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이 궁전은, 바르보[Barbo] 가문의 피에트로 추기경이 1455녀 자신의 교구 성당인 산 마르코[San MARCO] 성당 동쪽에 지은 로마 시 최초의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요새식 궁전과 거대한 정원으로 이루어졌다. 피에트로는 1464년 파울루스 2세로 교황이 된 후 이 곳을 자신의 궁전으로 삼았는데, 그 이유는 시 외곽에 있고 분위기도 딱딱한 바티칸 궁전보다는 시내 중심에 있는 이곳이 시민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고 생동감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1564년 피우스 4세가 궁전과 성당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기증할 때까지 후임 교황들도 선례를 이어갔다. 이후 이 궁전은 베네치아 대사관저로, 성당은 베네치아 인들의 성당으로 사용되었다. 베네치아 궁전은 1814년 베네토 주를 정복한 오스트리아의 수중에 넘어가 100년 이상 오스트리아 대사관으로 쓰였으나 1916년 1차 세계대전 전야에 이탈리아 정부가 몰수했다. 이 궁전은 파시즘 시대에 무솔리니의 관청으로 사용되었는데, 1930년대에 무솔리니가 중앙 발코니에서 군중을 선동하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이 궁전은 호전적이고 엄격한 중세에서 세련된 르네상스 시대로 이행하는 단계로 가장 잘 보여준다. 육중한 탑이나 협간(좌우 양쪽의 있는 방), 그리고 장식이 없고 육중한 벽은 중세 분위기의 잔재인 반면, 넓고 숫자도 많아진 창문들과 정교한 중앙 문은 새로운 시대 분위기를 예고한다. 전형적인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 뜰을 교황의 예술고문으로 활약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베네치아 출신 파울루스 2세는 1466년, 여러 곳에서 벌이던 사육제(Carnevale)를 베네치아 궁전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코르소 길로 몰아 이 거리를 사육제 거리로 만들었다. 이 직선 도로는 사육제 거리로 정해지면서 사육제뿐 아니라 달리기와 경마 시합이 열리는 명소가 되었다. 사육제 기간에는 코르소 길 양쪽의 가옥과 궁전 발코니가 구경꾼들로 가득 찼고, 발코니는 임대를 하기도 했다. 사육제 출발지는 포폴로 광장이었고, 도착 지점은 베네치아 광장과 카이사르 광장 사이의 공터였다.
코르소 길의 경마 시합은 기수가 말을 모는 게 아니라 성난 말들이 알아서 직선 길을 질주하는 방식이었다. 한편 달리기(Corso) 시합은 이 길 이름의 유래가 되었는데, 이 시합의 희생자는 유대인들이었다. 이미 1200년부터 옷에 노란 동그라미 표식을 달아야 했던 로마 유대인들을 종교개혁과 가톨릭 종교개혁의 와중에 고조된 반유대주의 분위기 때문에 게토에 갇혀야 했고 사육제 기간이 되면 헝겊으로 사타구니만 가린 채 코르소 길에서 달리기를 해야 했다. 이 관행은 17세기 말에 폐지되었지만 대신 이들은 1848년까지 경마 비용을 부담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18세기 말 코르소 길에서 살았던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에서 사육제에 대해 “처음 보는 이국인에게는 로마 사육제가 그렇게 유쾌하지도 즐겁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을지 모른다. ∙∙∙ 인공조명도, 화려한 행렬도 없고, 신호가 떨어지면 모두가 미쳐버리고 멍청이가 된다. 주먹질이나 칼 싸움질만 아니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신분 차이도 없고 누구나 자유롭게 움직인다. 모두 어울려 즐기는 분위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있어도 대수롭지 않다. ∙∙∙∙∙ 주어진 축제가 아니라 시민들이 스스로 만드는 축제라 정부에서 개입하거나 통제하지도 않는다. 경찰이 하는 일이란 너그럽게 사람들의 행렬이 잘 돌아가게 살펴주는 것뿐이다.”라고 묘사했다.
고대 로마의 사투르 날리아에서 기원한 사육제는 지금도 부활절과 3월 19일 성 요셉 축일, 10월의 포도 수확 축제 오또 브라타[Ottobrata]와 함께 시 차원의 행사로 유지되고 있다. 오늘날 코르소 길은 시내 교통의 동맥 선이다. 스페인 광장 앞 콘도티가 와 만나는 이 거리는 쇼핑가와 궁전들로 유명하지만, 최근 포폴로 광장 끝에 잡상이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우아한 분위기가 많이 깎였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두 번째 블록에 위치한 산 마르첼로[San Marcello] 성당은 고대 로마의 우체국 본부(Catabulum) 자리에 들어선 성당인데, 4세기에 교황 마르켈루스 1세가 막센티우스 황제의 명으로 이 우체국에서 강제노동을 했던 연유로 교황의 이름이 붙었다. 이 성당은 1519년 화재 후 방치되었다가 150년 후에 재건되었으며, 카를로 폰타나의 바로크식 정면은 17세기 말에 완성되었다. 마르첼로 광장을 가로지르는 코르소 길의 일부가 플라미니아 가도 상의 폭이 넓은 부분이라 라타 길(Via Lata)이라 불렸던 공터 자리이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이 공터는 트레비 분수를 거쳐 판테온 뒤 아그리파 목욕장으로 뻗은 수로와 플라미니아 가도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사육제 때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축제의 자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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