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아 줄리아[Via Giulia](줄리아 길)
바티칸은 넓고 곧은 새 도로들이 뚫려야 도시의 나머지 지역과 연결되고 수많은 성지순례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앞에서 이야기한 코르소 길과 리페따 길이 15세기 후반에 보수, 신설되었고, 이어서 1503년부터 1523년 사이에 남쪽과 동쪽에서 바티칸으로 진입하는 데 필요한 두 길, 룽가라 길과 줄리아 길이 건설되었다.
길이가 1km 정도인 줄리아 길은 1508년에 율리우스 2세와 브라만테의 주도로 건설되었는데, 도시계획 면에서 르네상스의 이상을 잘 드러내주는 대표적인 로마 거리였다. 이 길은 르네상스 시대 로마 도로망의 동맥이었고 근대 말까지도 그 기능을 유지했으나, 통일 이후 베네치아 광장과 바티칸을 연결한 간선도로가 뚫리면서 쇠퇴하게 된다. 한편, 이 길과 성 천사의 다리를 연결한 파올라 길은 1540년대에 파울루스 3세가 건설한 길이다.
줄리아 길의 끝 황금 광장(Piazza d’Oro) 옆에는 산 조반니 데이 피오렌티니[San Giovanni dei Fiorentini] 성당이 서 있다. 16세기 초에 야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가 설계 건축한 이 성당은 이 구역에 거주하는 피렌체 인들의 성당으로 이들이 로마 문화와 경제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문 위 벽감에 있는 세례 요한 상은 15세기 말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성물실로 가는 복도에 잔 로렌초 베르니니와 그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니니가 제작한 카를로 마데르노의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에 잔 로렌초 베르니니와 쌍벽을 이룬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의 유해도 들어 있다. 주 제단을 설계한 보로미니는 고통스러운 삶을 자살로 마감했는데, 자살한 자의 유해를 성당 안에 안장하지 못하게 하는 교회법 때문에 비밀리에 매장되었고 따라서 이름조차 비문에 기록되지 않았다. 이 성당은 애완용 개과 고양이도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성당이다.
이 길의 1번지 팔코니에리 궁전[Palazzo Falconieri]은 현재 헝가리 문화원 건물인데, 17세기에 보로미니가 설계한 정면이 아주 환상적이다. 그는 궁전 주인의 성을 연상시키려는 의도로 양 측면 기둥을 얼굴이 매(falco)모양인 여인 흉상으로 장식했다.
이 궁전 옆에 있는 기도와 사망의 성모 마리아(S. Maria dell’Orazione e Morte) 성당은 16세기 건물로 1733년 페르디난도 푸가[FERDINANDO fuGA]가 정면을 완성했다. 이 성당의 이름에 ‘모르테’, 곧 사망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유는 강도나 전염병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유골을 모아 지하납골당에 안치해놓았기 때문인데, 질병과 빈곤이 보편적인 사회에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줄이려는 성당의 의도가 작용한 것이었다. 내부에는 17세기에 조반니 란프랑코가 은자들을 묘사한 벽화가 있는데, 성당 왼쪽에 파르네제 가문이 만든 격리된 기도실에서 은둔생활을 한 사람들을 주제로 삼았다.
줄리아 길 위에 있는 아치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파르네제 통로로 파르네제 궁전과 지금은 사라진 강변의 건물을 연결한 육교다. 그 옆으로 파르네제 궁전(Palazzo Farnese)의 뒷면이 보이는데, 이 궁전은 1517년 추기경 알레산드로 파르네제[Alessandro Farnese](교황 파울루스 3세)의 뜻에 따라 안토니오 다 산갈로가 설계했다. 1층과 2층만 완성한 후 안토니오 다 산갈로가 죽자, 뒤를 이은 미켈란젤로가 정면을 다시 설계하고 내부구조도 일부 수정하여 틀이 잘 잡힌 3층 건물을 완성하였다. 베네치아 궁전의 정면이 성채와 같은 육중한 분위기를 간직한 데 비해, 이 궁전의 정면은 층 높이가 같고 층마다 다른 양식의 원주와 선 장식을 쓴 창문틀이 배치되어 산뜻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569년에서 1573년 사이에 비뇰라[Vignola]가 2개의 큰 회랑으로 연결된 별궁(Ala Posteriore)을 추가시켰다.
안니발레 카라치와 형 아고스티노 카라치가 1597년부터 7년에 걸쳐 약 20 ⅹ 6.5m 넓이의 별궁 중앙 회랑을 장식했다. 그의 이름을 따 카라치 회랑이라 불리게 되는 회랑의 볼트형 천장에는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벽에는 틀 장식과 벽감을 설치해 이 가문이 소장한 조각상들을 올려놓았는데, 대칭형의 액자 그림들로 천장을 가득 채운 것이 특징이다. 파르네제 가문이 이 작품을 완성한 카라치에게 칠 값밖에 안 되는 잔돈푼을 쥐어주어 충격을 받은 카라치가 한동안 붓을 꺾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이 작품을 지금은 이 건물을 차지한 프랑스 대사관의 까다로운 통제 때문에 감상하기가 힘든 불운을 겪고 있다.
2층에는 코린트식 기둥으로 장식된 13개의 창문이 나 있는데, 중앙 창문의 기둥 2개는 로마 시대 목욕장에서 나온 녹색 기둥이다. 3층의 창문들은 이오니아식 반원주들로 장식되어 있고, 기둥 아래에는 파르네제 가문의 상징인 백합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최근 지하실에서 로마 시대 모자이크 바닥이 발견되었는데, 경마팀 숙소 바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궁전 앞 광장에 1626년 카라칼라 목욕장에서 찾아낸 화강암 수조를 재활용해 설치한 2개의 분수가 있다.
이 궁전은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가 개종해 로마에 자진 망명한 후 1년 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1731년 파르네제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엘리자베타 파르네제[Elisabetta Farnese]가 나폴리 왕 부로봉의 샤를르와 결혼함에 따라 나폴리 왕가에 귀속되었는데, 샤를르는 궁전 소유 미술품과 가구를 나폴리와 카세르타의 왕궁에 옮기게 함으로써, 한동안 이 궁전은 방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가리발디 군의 공격으로 밀려나게 된 부르봉가가 이 궁전을 임시 왕궁으로 삼으면서 1864년 부르봉의 페르디난도 2세의 지시로 안토니오 치폴라[Antonio Cipolla]의 감독하에 복구작업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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