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궁전은 1911년 프랑스에 임대되어 현재 프랑스 대사관저로 사용되고 있는데, 2035년에야 임대계약이 끝나게 된다. 방문 절차가 매우 까다로워 일반인이 카라치 회랑의 천장화를 구경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파르네제 궁전 남쪽 두 번째 블록을 차지하고 있는 스파다 궁전[Palazzo Spada]은 16세기 중반에 카포 디 페로 가문의 추기경 지롤라모[Girolamo Capo di ferro]가 세웠는데, 건축가는 카라바조 출신의 줄리오 메리시[Giulio Merisi da Caravaggio]로 추정된다. 참고로, 16세기 말의 자연주의 화가 카라바조는 본명이 미켈란젤로 메리시로 줄리오와 인척 관계였는데, 유명해지는 바람에 추신지 카라바조가 이름으로 굳어져버렸다. 피아첸차 출신 줄리오 마조니[Giulio Mazzoni]가 설계한 정면은 바로크 양식이 임박했음을 예고하는 회벽 장식과 조각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스파다 궁전은 원래 카포 디 몬테 가문의 궁전이었는데, 상속받은 추기경의 조카 파올로가 스파다 가문의 베르나르디노 추기경(Bernardino Spada)에게 매각함에 따라 스파다 궁전이 되었다. 세련된 예술 애호가였던 베르나르디노는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에게 보수 작업을 맡겼다. 1927년 이탈리아 정부가 이 궁전을 구입하여 현재 국가 자문 회의장(Consiglio과 스파다 미술관(Galleria Spada)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궁전의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에 속하지만 장식은 바로크 양식이다. 정문 위에는 궁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스파다 가문의 문장과 가 포디 페로 가문의 문장이 조각되어 있다. 2층에는 9개의 창문 사이에 8개의 벽감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안에 로물루스와 누마 왕, 파비우스와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같은 명장과 황제의 석고상이 놓여 있다. 2층과 3층 사이 공간은 석고 여인상 부조와 꽃 줄 장식, 메달형 부조 장식으로 처리되어 있고, 3층 창문들 사이에는 이층 석고상들을 설명한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궁전의 자랑거리는 짧은 회랑들로 연결된 중앙 정원으로, 보수 작업을 맡은 보르미니가 1653년 중앙 정원 왼쪽에 건축한 원근 구도의 회랑(Galleria prospettica)이 압권이다. 이 회랑은 실제 길이가 8m 정도인데, 3배 이상 길게 느껴지고 끝의 석상도 65cm 밖에 안되지만 상당히 커 보인다. 회랑 정원의 한쪽은 마조니가 켄타우로스, 맹수 사냥, 신과 정령들을 묘사한 석고 부조물들로 장식되어 있다. 미술관에는 16~17세기에 스파다 가문이 수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구이도 레니[Guido Reni], 괴르치노[Guercino],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의 그림들이 있다. 자문회의장으로 쓰이는 큰 방에는 르네상스 시대에 인근 광장에서 발견된 1세기 석상이 놓여 있는데, 근거는 없지만 카이사르가 그 발 밑에서 살해되었다는 임시 원로원의 폼페이우스 상으로 알려져 있다.
줄리아 길의 남쪽 끝은 테베레 강의 시스토[Sisto] 다리와 만난다. 고대의 아우렐리우스 다리가 무너진 자리에 1475년 성년을 기념해 식스투스 4세가 석회화로 건설한 이 다리도, 부드럽고 조화로운 모양과 완벽한 테크닉으로 로마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축물의 하나이다.
시스토 다리와 직선으로 연결된 페티나리[Pettinari] 길 끝 펠레그리니[Pellegrini] 광장에 들어선 순례자의 성 삼위일체[Santissima Trinita dei Pellegrini] 성당은 17세기 초에 재건된 중세 기원의 성당이다. 성년에 로마에 오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가 곁에 있어 순례자 보호를 기원하는 이름을 붙였다. 이 성당은 교황을 포함한 고위 성직자들이 순례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행사 때문에 유명해졌다.
줄리아 길과 평행으로 놓인 몬세라트 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몬세라토[Santa Maria Monserrato] 성당은 육중하고 엄격한 분위기를 지닌 스페인 사람들의 성당이고, 길 건너편에 있는 산 토마소 디 켄터베리[San Tommaso di Canterbury] 성당은 영국 가톨릭 성당으로 위엄과 조화감을 느끼게 한다. 1638년 존 밀턴[John Milton]이 로마에 왔을 때 머물렀던 성당이다.
파르네제 광장에는 스웨덴 출신의 자매 성녀 브리지다와 카테리나에게 바친 산타 브리지다[Santa Brigida] 성당이 우아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 성당은 스웨덴 가톨릭 성당이다.
파르네제 광장 앞 골목길을 지나면 캄포 데이 피오리[Campo di Fiori] 광장이 나온다. 로마 시대에 전차 경기용 마차 차고들이 있던 서민 구역이었으나, 중세 시대에 방치되어 풀밭이 되었고 그래서 꽃밭이란 이름이 붙게 된 이 광장 지대도 비록 풀밭 사이로 난 시골길이지만 바티칸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의 도시화 대상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순례자 길(Via del Pellegrino)이 생겨났고, 광장 주변은 인구 밀집 지대로 변모하였다. 16세기에 이 광장은 로마 시대 포룸[Forum]처럼 시민들이 모이고 시장이 서고 포고문이 낭독되는 장소였다. 물론 반역자나 이단자에 대한 공개 처형도 이 광장에서 진행되었고, 광장 가운데에 서 있는 청동상의 주인공 주인공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도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몰려 1600년 이 자리에서 화형에 처해진 철학자이다.
광장의 북쪽 끝에 칸첼레리아 궁전[Palazzo della Cancelleria]의 모서리 부분이 보인다. 이 궁전은 식스투스 4세의 조카 라파엘레 리아 리오[Raffaelle추기경이 1485년에 세운 사다리꼴의 거대한 궁전으로, 브라만테가 궁전에 포함된 성당의 일부를 절단하고 그 안에서 나온 화강암 기둥들을 이용해 아름다운 정원을 꾸몄다. 율리우스 2세의 사촌이기도 한 리아 리오 추기경은 처음 로마에 온 미켈란젤로에게 궁전 안에 숙소를 마련해주었고,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이 궁전에서 만난 한 추기경으로부터 <피에타 상> 제작 의뢰를 받기도 했다. 건물의 정면은 비슷한 연대의 건축물인 파르네제 궁전보다 더 기하학적이고 심미적이다.
리아리오가 레오 10세를 제거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됨에 따라 이 궁전은 교황령 국가에 귀속되어 교황청 서기국(Cancelleria Apostolica) 자리가 되었다. 1798~1799년에는 로마 공화국(Repubblica Romana)의 재판소로, 그리고 1810년 나폴레옹 군이 점령했을 때는 제국 법정(Corte Imperiale Napolenica)으로 사용되었는데, 발코니 위에 붙어 있는 비문에 제국 법정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1849년에는 로마 공화국의 제헌의회가 들어서기도 했지만, 이후 교황청 서기국으로 그 기능으로 되찾았고, 1929년 라테란 조약에 따라 초영토권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고고학과 고∙중세 미술사 연구 기관인 로마 교황청 고고학회(Pontificia Accademia Romana di Archeologia)가 자리 잡고 있다.
무솔리니 시대에 이 궁전의 왼쪽을 지나가는 새 도로가 뚫리면서 중세∙근대에 교황청으로 가는 옛 길(Via Papale), 곧 마르첼로 극장 앞에서 캄포 데이 피오리 광장을 거쳐 황금 광장을 향해 난 길은 골목길로 바뀌었고, 새도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가도가 마르스 평원을 가르는 중심축이 되었다. 칸첼레리아 궁전에서 이 길을 따라 베네치아 광장 쪽으로 100m쯤 가면, 산탄드레아 델라 발레[Sant’ Andrea della Valle] 성당이 나온다.
이 성당의 중앙 복도가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의 무대 배경으로 세간에 잘 알려지기도 했지만, 후진과 쿠폴라와 벽화를 그린 두 화가, 도메니키노와 조반니 란 프랑코의 재능과 갈등 때문에 말이 많았던 성당이다. 처음에는 안니발레 카라치의 제자들 중에 재능이 가장 뛰어났던 도메니키노가 후진 벽화와 쿠폴라 천장화를 모두 그리기로 했으나, 이를 시기한 란 프랑코가 로비활동으로 쿠폴라 천장화 작업을 빼앗았다. 그 결과 벽화 작업은 라파엘로 다음가는 르네상스풍의 대가로 평가되는 도메니키노와, 베르니니로 이어지는 로마 바로크의 선구자 란 프랑코의 작품 대결이 되었다.
이 성당은 17세기 초에 카를로 마데르노의 설계로 카를로 라이 날디에 의해 지어졌는데, 마데르노의 재능은 건물의 조형미와 뛰어난 명암 효과뿐 아니라 로마에서 두 번째로 큰 쿠폴라에서도 잘 드러났다. 쿠폴라 천장화 <천국의 영광>은 조반니 란 프랑코의 작품인 반면, 그 아래 복음서 저자들을 소재로 한 그림은 도메니키노의 작품이다. 도메니키노는 후진에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부름 받는 장면과 십자가에 묶여 매질당하는 장면, ⅹ자형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는 장면을 르네상스 이상에 걸맞게 완벽한 균형미로 묘사했다. 왼쪽 첫 예배당의 벽감에 피에트로 베르니니의 세례 요한 상이 놓여 있으며, 측면 두 문 위의 대리석 아기천사 상(putto)들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이 성당 안에는 시에나 출신의 두 교황 피우스 2세와 3세의 무덤이 있다.
성당 정면 앞으로 나 있는 코르소 델 리나쉬멘토[Corso del Rinascimento] 길 중간에 마다마 궁전이 자리 잡고 있다. 나보나 광장과 판테온 사이에 위치한 이 궁전은 건축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15세기 건물로 1505년 메디치가의 조반니(교황 레오 10세) 추기경이 구입하였으나 무리한 건물 구입에 따른 자금 부족으로 곤경을 겪어 사촌 알폰시나 코르시니에게 매각했다가 다시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1642년 파올로 마루첼리[Paolo Marucelli]와 루도비코 카르디[Ludovico Cardi]에 의해 바로크 양식의 정면이 완성되었다. 메디치가의 알레산드로[Alessandro de’Medici]와 결혼한 오스트리아 황제 카알 5세의 서녀 마르게리타[Madama Margarita d’Austria]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이름이 붙었었는데 훗날 이름은 빠지고 귀부인(Madama)이라는 경칭만 남게 되었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메디치가의 카테리나가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결혼하여 파리로 떠날 때까지 살았던 궁전이기도 하다. 1871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국회의 상원(Senato)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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