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티칸 궁전의 확장
800년 프랑크 왕 샤를마뉴가 제관을 받기 위해 로마에 왔을 때 머무른 숙소는 베드로 대성당 옆에 있는 작은 궁전이었다. 이 6세기 궁전은 모슬렘족이 로마에 침입한 9세기 중반, 레오 4세에 의해 일부 확장되었고, 13세기에는 전면적인 재건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70년간의 아비뇽 유수로 인한 교황권의 분열과 쇠퇴의 영향이 바티칸에도 크게 미쳐, 1377년 교황이 아비뇽에서 돌아왔을 때 바티칸의 중세 궁전은 매우 볼품없는 상태였다. 바티칸 교황청은 뒤를 이은 대분열과 종교회의 지배 시기를 넘긴 15세기 중반에 들어서서야 권위를 회복하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교황청 확장 및 치장 사업은 1550년경 교황 니콜라스 5세(1447~1455년)가 측면 건물을 지어 중세 궁전을 확장하고 자신의 개인 예배당과 탑을 추가시키면서 시작되었는데, 피렌체 출신의 건축가이자 <건축 10서>를 저술한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이론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교황의 예술고문으로 활약하면서, 건축 사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웅장한 건물들에서 성당의 권위가 시각적으로 드러나고, 세상은 이를 바로 인정하게 된다’는 주장을 폈다.
니콜라스는 궁전 외부를 요새 화하는 동시에 내부를 거대하고 화려한 르네상스식 방들로 꾸미고, 프라 안젤리코를 초청해 니콜로 예배당을 장식했다. 중세 궁전은 현재 중앙 정원이 있는 직사각형 건물에 3개의 탑이 올려진 모양으로 사방이 방어요새로 되어 있다. 원래 공식 접견과 추기경 회의, 종교재판을 하는 방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시스티나 예배당과 연결된 대기실로 이용되는 살라 레지아[Sala Regia]와 공식 추기경 회의가 열리는 살라 두칼레[Sala Ducale]가 있다.
1470년대에 들어 궁전의 서쪽이 취약하다고 판단한 식스투스 4세(1471~1484년)는 궁전 바로 옆에 베드로 대성당과 연결되고 회랑 망루가 있는 요새형 건물을 세웠다. 바초 폰 텔리[Baccio Fontelli]가 설계하고 조반니노 데 돌치[Giovannino de’Dolci]가 지은 이 건물은 외부로부터 쉽게 격리, 보호된다는 장점 때문에 음모와 사기가 판치던 시기에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단 회의장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뒤이어 국가적인 행사를 치르는 대예배당으로 자리 잡으면서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알려지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으로 유명한 이 예배당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2가지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로부터 한 세기 후, 로마 시 건축과 도시계획에 지문을 남기는 건축가 교황 식스투스 5세가 라테란 궁전을 재건하는 동시에 바티칸에 식스투스 5세 궁전(Palazzo di Sisto Ⅴ)을 세웠다. 1589년 라테란 궁전을 재건한 도메니코 폰타나가 같은 해에 이 궁전의 신축 사업도 맡아 정사각형의 궁전을 건축했는데, 이 궁전은 성 다마 수스 정원(Cortile di Santo Damaso)을 사이에 두고 중세 궁전과 마주 보고 있다. 광장 바로 옆의 건물로 일요일 정오에 교황이 서재의 창문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현재 2층에는 교황이 거처하고, 3층에는 교황의 개인 서재와 개인 예배당이 있다. 1층은 비서 추기경의 관저다. 중세 궁전과 그레고리우스 13세 궁전, 식스투스 5세 궁전을 포함한 베드로 대성당 옆의 요새화 되어 있는 공간은 사도 궁전(Palazzi Apostolici)이라 부른다.
바티칸 궁전의 확장이 단순히 중세 궁전을 중심으로 한 증축∙신축 공사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바티칸 궁전은 오늘날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바티칸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이유는 물의 도시 로마에서 이야기한 언덕 선호 경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강에서 가까운 평지에 서 있는 중세 궁전이 경관 면에서나 위생 면에서 별로 좋지 않다고 판단한 인노첸트 8세(1484~1492년)가 1490년경 약 6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바티칸 언덕의 북쪽 둔턱에 자신의 거처로 쓸 궁전을 짓게 하면서 바티칸 궁전은 현재의 윤곽을 갖게 된다. 1484~1487년에 야코포 다 피에트라산타[Janopo da Pietrasanta]가 건축한 이 궁전은 회랑식 3층 건물로 자연경관을 감상하기 좋은 위치 때문에 벨베데레(전망대) 궁전[Palazzo del Belvedere]이라고 불리었다.
이후 율리우스 3세의 지시로 벨베데레 회랑 궁전과 중세 궁전을 연결시키는 회랑 신축 공사가 브라만테에 의해 진행되어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브라만테의 회랑이 탄생하였고, 피우스 4세(1559~1565년) 때 피로 리고리오[Pirro Ligorio]가 안쪽의 회랑은 완성하였다. 1514년 브라만테가 사망한 후 라파엘로가 3층 공사를 맡아 1519년 완성하였으므로 브라만테의 회랑을 라파엘로의 회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8세기 후반에 전망대 회랑 건물 2층에 피오 클레멘티노[Pio-Clementino] 박물관이 들어섰고, 19세기 초에 브라만테 회랑 1층에 키아라몬티[Chiaramonti] 박물관이 자리 잡았으며, 이어서 리고리오 회랑에 칸델라브리 미술관과 아라스 천 미술관, 지도 미술관이 들어섰다.
양쪽의 궁전을 2개의 회랑으로 연결함에 따라 그 사이에 기다란 정원이 형성되었고, 교황들이 이 뜰을 사교의 장소로 활용함에 따라 향락의 뜰(Atrio del Piacere)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감각적인 일보다 건축과 도시계획에 더 관심이 많았던 식스투스 5세는 1587~1588년에 뜰을 가로지르는 건물(Salone di Sisto Ⅴ)을 세워 정원을 둘로 나누고, 신축 건물을 바티칸 복음 도서관으로 활용하였다. 귀중한 고서와 필사본을 소장한 이 건물의 프레스코 벽화들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와 다비드 기를란다요[Davide Ghirlandaio], 메로초 다 포를리[Melozzo da Forli]가 장식하였다.
마지막으로 1817~1822년 사이에 라파엘 스테른[Raffael Stern]이 도메니코 폰타나가 만든 건물 북쪽에 브라초 누오보 회랑을 신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이 회랑은 1816년 비엔나 회의 결과 나폴레옹에게 빼앗겼던 박물관∙도서관 소장품들의 일부를 돌려받게 된 교황청이 이를 수용하기 위해 박물관 용도로 지은 건물이다.
벨베데레 궁전과 부리초 누오보 사이에 있는 정원은 궁전 안벽이 만든 거대한 후진에 놓인 청동 솔방울 상 때문에 솔방울 정원(Cortile della Pigna)이라 불린다. 이 솔방울 상은 마르스 평원의 이시스 세라피스 신전을 장식했던 것으로 8세기부터 중세 궁전 뜰에 있다가, 1608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양 옆의 공작 상은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청동상 복제품으로 원본은 정원 맞은편 브라초 누오보 박물관에 있다. 솔방울 상 기단으로 쓰인 대리석 기둥머리는 3세기 것으로, 승리한 운동선수를 묘사한 부조 장식이 있다. 양옆의 계단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으로 캄피돌리오 언덕의 시청 앞 분수 계단을 연상시킨다. 솔방울 상 앞의 분수 양옆에는 기원전 4세기에 이집트에서 제작한 사자 상 2마리가 놓여 있다. 후진 건물 1층은 이집트 박물관, 2층은 에트루리아 박물관이다. 정원 중앙에 아르날로 포모도로[Arnaldo Pomodoro]의 작품 <천체와 천체(Sfera con sfera)>가 있다.
한편, 그레고리우스 13세는 1578~1580년 오타비아노 마스케리노[Ottaviano Mascherino]에게 전망대 회랑 궁전의 서쪽에 탑을 세우게 하고, 그 안에 해시계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이론적으로 율리우스력의 오차 문제를 제기한 이냐찌오 단티[Ignaio Danti]에게 실험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단티는 이 해시계를 이용하여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정한 춘분 날짜 3월 21일이 잘못된 것이고 실제는 3월 11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결국 1582년 2월 24일 과학자 루이지 릴리오[Luigi Liglio]와 안토니오 릴리오[Antonio Liglio]가 고안한 계산법에 따라 율리우스력을 개정한 새 달력을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공식적으로 공포하게 되는데, 이 달력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그레고리우스력이다.
1506년 율리우스 2세가 창설한 스위스 근위대는 1527년 신성로마 제국 황제 카알 5세의 로마 침입 시 레오 성벽 위의 통로를 통해 메디치 가문의 클레멘트 7세를 성 천사의 성으로 무사히 피신시켰다. 지금도 스위스 근위대는 메디치 가문의 상징인 빨강 파랑 노랑의 16세기 복장을 유지하고 있다. 스위스는 절대주의 국가들이 국군 위주의 군사력을 확보하기 이전에 용병으로 맹위를 떨쳤는데 영세중립국이 된 후에도 국외에 나가 있는 유일한 용병대가 스위스 근위대다. 열강들이 스위스를 영세중립국으로 인정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한 가지가 스위스 용병들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이들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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