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주 형태와 특성과 물 문화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에 쟁기로 고랑을 파 시 경계로 삼으면서 형성되었다는 로마 콰드라타(Roma quadrata)(초기의 사각형 로마 시내)는 왕정기(기원전 753~510년)를 거치면서 4개의 언덕을 포함하는 규모로 커졌고(실제 기원전 4세기 축조물인 세르비우스 성벽 안의 4개 자치구 도시),, 인근 종족민들의 유입과 세력 성장의 결과 꾸준히 인구가 증가하여 공화정 후기에 이르면 7개 언덕(카피톨리움, 팔라티움, 아벤티누스, 캘리우스캘리우스, 에스퀼리에에스퀼리에, 비미날리스비 미날 리스, 퀴리날리스)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규모 확대는 남서 – 북동 축의 고지대 위주로 진행된 게 특징이었다.
로마의 언덕들은 라티움(Latium) 평원에 흔한 말라리아를 피할 수 있고 개활지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곳이어서, 이미 로마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라틴 인, 사빈 인, 에트루리아 인들이 접촉하면서 촌락들이 형성된 곳으로, 테베레 강물의 흐름과 로마 시의 출현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테베레 강 오른쪽 기슭의 홍적층 대지와 왼쪽 기슭의 알바노(Albano) 화산군의 용암에 의해서 좁아지는 지점(현재의 티베리나 섬 부근)까지 작은 배가 올라갈 수 있었고, 그보다 좀 더 상류에는 아펜니노 산맥의 구릉 지대에 이르는 중요한 교통로인 아니 에 네(Aniene)강이 합류했다. 교통 요지에 시장 도시로서 생겨난 곳이 바로 로마였다.
기원전 2세기에 테베레 강기슭은 정돈되어 가축시장이었던 포룸 보아리움(Forum Boarium)에 신전들이 들어서는 대신, 아벤티노 언덕 아래 현재의 테스타초(Testaccio) 구역에 새 항구시설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이 거대한 상업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기원전 179년에서 142년 사이에 처음으로 에밀리우스 다리(Pons Aemilius)라고 불리는 돌다리도 놓였고,테베레 강의 중요성을 인식한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기원전 27~ 서기 14년)는 강변 관리관을 따로 두었다.
그러나 로마 인들은 테베레 강의 수자원과 강변의 공간을 적극 활용하면서도 정작 거주지로는 언덕 지대를 고집했다. 남쪽 능선 지대에서 목축과 농사를 짓는 라틴계 주민들은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 때문에 언덕을 택했고, 이 밖에도 테베레 강의 잦은 범람으로 인해 강 유역이 정주지로는 적합하지 않았고 말라리아모기가 극성을 부리는 등 위생상의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강변 저지대가 방치된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초기 로마 인들은 관개사업을 통해 팔라티노 언덕과 아벤티노(Aventino) 언덕, 캄피돌리오 언덕 사이 골짜기를 시장터로, 또 공동의 모임터로 바꾸었고, 공화정의 성립과 더불어 타르퀴니우스 왕가의 사유지였던 캄피돌리오 언덕 북쪽의 넓은 저지대를 몰수하여 공용 목적으로 활용했다. 주거지로도 경작지로도 개발하지 못한 이 평원은 군신 마르스(Mars)에게 봉헌되어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Campo marzio])라 불렸는데, 이름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곳은 병사들이 훈련받는 곳이었다.
마르스 평원은 군단소집과 켄투리아회(Comitia centuriata) 투표장으로 사용되었고, 5년마다 인구조사를 할 때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인구조사 담당 정무관인 켄소르(Censor)나 타국의 사절들이 숙식하는 공관(Fattoria pubblica)도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관개시설의 확보와 저지대 수용이 로마 인들의 정주 형태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영토 확장과 패권 장악으로 인해 로마 시에 몰려든 사람들과 자체 인구 증가로 로마의 인구밀도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도 언덕 정주 형태의 특성은 변하지 않아, 기원전 1세기에 거의 100만에 육박하는 주민 수에도 불구하고 평원 지역으로 거주지가 확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사회의 하층을 이루는 다수의 서민들은 비탈길에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임대 아파트인 인술라(Insula)에서 거주하였고, 상층민들은 언덕 위 저택들을 차지하였다.
특히 원로원 귀족들은 팔라티노, 벨리, 캄피돌리오 언덕 위 공기 좋고 전망 좋은 곳을 선호했는데, 그중에서도 팔라티노 언덕은 고위 정치가들이 각축을 벌인 곳이었다. 언덕 위 저택은 신분을 뛰어넘는 정치가가 출세를 과시하는 최적의 수단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적들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 한 예로, 키케로는 크랏수스 소유의 저택을 구입했는데, 카이사르(Caesar)의 부인과 가진 불륜관계를 폭로한 키케로(Cicero)에 대해 앙심을 품은 호민관 클로디우스(Clodius)가 그를 추방하고 저택을 부숴버린 점이나, 유배지에서 돌아온 키케로가 저택을 다시 짓는 걸 끝까지 방해한 점은 언덕 위 저택의 위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결국 키케로는 클로디우스를 죽이고서야 언덕 위 저택을 소유할 수 있었다.
사실 로마 광장 주변의 언덕 저택들은 유행과 과시욕에 더해 피호제(Clientela, 고대 로마 사회에서 보호인과 피 보호인의 관계를 통칭하는 용어) 정치구도의 부산물이었다. 이 점은 군사력을 보유한 전쟁영웅들이 외곽 언덕의 채원이 있는 넓은 저택을 선호한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은 광장의 인민이 아니라 군대에서 권력과 영예를 찾았기 때문에 광장 지대를 기웃거리며 민심을 얻을 필요도, 광장에서 올려다보이는 웅장한 저택을 소유할 필요도 없었다.
서민들이 비탈길 목조 아파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 이유도 피보호 제로 설명할 수 있다. 대부분 도시 노동자들인 서민들은 상층민의 피보호인(Cliens)인 경우가 많았다. 보통 피보호인은 아침마다 보호인(Paturonus)의 집에 들러 문안인사를 하고 먹을거리를 얻곤 했는데, 보호인이 필요로 하는 경우 정치집회에 동원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은 보호인인 귀족의 저택과 가깝고 로마 광장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살아야 했는데, 이에 해당되는 곳이 바로 언덕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이었다. 이 비탈길에 형성된 서민 밀집 지대는 자체 경제를 유지시켜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주 형태는 공화정 시대 로마의 건축술과 기술력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시가 발전하는 만큼 주민들의 주거환경도 이에 걸맞게 따라가야 했으므로, 상하수 시설의 확충이 절실했는데, 로마 시는 강변을 낀 다른 평지 도시들과 다른 방향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로마가 전략적 요충지에 건설한 식민 시들은 거의 대부분이 방어상 이점이 있고 식수원 확보가 용이한 강변 평지에 위치했고, 도시들이 발전한 후에도 인접한 강의 의존도가 높았다. 반면, 로마 시는 테베레 강과 곳곳의 샘, 우물을 이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인위적인 수단을 이용한 상수 체계를 갖추게 된다. 고지대 거주 특성이 상하수 시설 발전에 영향을 미쳐 로마가 대외적으로 팽창하는 시기에, 주변의 수원지가 있는 땅들을 로마의 영토 안으로 편입시킨 후 바로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 건설 사업에 돌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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