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로의 역사
로마 인들의 탁월한 토목 건축술은 수로 건설에서 잘 드러난다. 전문적인 측량기사들이 직선을 긋고 직각을 잡는 그로 마(Groma)같은 매우 정밀한 기구를 사용해 거대한 축벽 사업을 주도했다. 노예들이 돌리는 톱니바퀴로 움직이는 거대한 기중기 덕에 무거운 돌을 끌어올려 쌓을 수 있었다. 각 수로의 건설자재나 모양은 각기 달랐지만, 수원지에서 모은 물을 산지의 경우 지하 갱도를 통해, 평지는 고가 수로를 통해 성문까지 운반한 후 성문의 분배장(spes)에서 압력을 가하여 수도관(fistulae aquariae)을 통해 각 구역으로 보내고, 이 곳에서 최종적으로 나누어지게 하는 방식은 똑같았다. 수로는 산악이나 호수로부터 로마 시로 매우 완만한 경사(1/1000도)로 물이 흘러들어 오도록 석회조 진흙으로 둘러싼 물받이 관들을 석판으로 덮은 구조물이다. 로마 인들은 물이 먼 거리까지 지속적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수원지에 큰 저장고를 설치하여 압력을 높였다. 물길이 시작되는 지역에는 대체적으로 지하수로를 설치하였고, 강이나 계곡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돌과 벽돌, 시멘트를 사용해 만든 교각을 설치하여 연결하였다. 로마 시내에 도착한 물은 연관이나 도관, 목조관을 통해 분수, 공공건물, 세면장, 목욕장에까지 배분되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이미 테베레 강이 오염되어 로마 인들은 시내 곳곳에 퍼져 있는 우물과 샘, 저수지에서 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했다. 가용 수자원이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원로원은 기원전 312년 아피아 가도(Via Appia) 건설자이기도 한 켄소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키에쿠스(Appius Claudius Ciecus)에게 최초의 수로 건설 사업을 맡겼다. 그 결과 아니에네 강물이 아쿠아 아피아(Acqua Appia) 수로를 통해 로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300년 후 아우구스투스가 수원지를 늘려 공급량을 배가했다.
기원전 272년 켄소르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Manius Curius Denatatus)가 63km 길이의 아니오 베투스(Anio vetus) 수로를 대부분 지하 수로로 건설하였고, 기원전 146년에는 프레토르(Praetor) 퀸투스 마르키우스 레(Quintus Marcius Re)가 성문까지의 길이가 91km에 달하는 가장 긴 고가 수로이자 공급량이 하루에 1만 9,000㎥로 로마 수로들 가운데 최대 규모인 아쿠아 마르키아(Acqua Marcia) 수로를 건설하여 캄피돌리오 언덕까지 물이 공급되었다. 기원전 125년에는 아쿠아 테풀라(Acqua Tepula) 수로가 건설되었는데, 테풀라는 물의 온도가 높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기원전 33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기원전 63?~12년)가 기존의 수로 4개를 보수하고 아쿠아 율리아(Acqua Iulia)수로를 건설하였다. 이 수로는 테풀라 수로와 합쳐졌다가 성문에서 위아래로 다시 갈라졌는데, 이 수로 덕분에 그는 500개 이상의 분수와 700개의 연못과 샘을 조성할 수 있었다. 아그리파는 기원전 19년에 자기 이름이 붙은 대규모의 국영 목욕장인 아그리파 목욕장(Terme di Agippa)을 세우는 동시에 물 공급을 위해 로마 시의 일곱 번째 수로인 아쿠아 베르지네(Acqua Vergine) 수로를 건설하였는데, 수원지는 콜라티나 가도(Via Collatina) 8마일 지점 루쿨라누스 농지(Agro Lucullano)였다. 다른 수로들처럼 이 수로도 수원지가 남동쪽이었지만, 로마의 북쪽으로 우회해 그동안 물 공급이 되지 못했던 북쪽 외곽 지대와 마르스 평원에 물을 공급하였다. 시멘트 벽으로 된 이 회랑형 지하 수로 아쿠아 베르지네는 폭이 평균 1.5m라 거의 작은 배가 다닐 수 있을 정도였고, 외곽 언덕 지대에서는 지하 30~40m 깊이를 유지하고 파이올리 지역은 구릉 지대이기 때문에 43m 깊이까지 내려갔다. 처녀 샘물이란 뜻의 이 수로의 이름은 물이 시원하고 깨끗하고 석회가 없다는 이유로 붙었는데, 목이 말라 샘을 찾던 아그리파의 부하 병사들에게 한 처녀가 샘의 위치를 알려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오늘날의 트레비 분수는 이 수로가 지나가는 길목에 세워진 것이다.
기원전 2년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한 알시에티나(Alsietina) 수로는 식수 공급 목적이 아니라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에 위치한 모의해전 경기장인 나우 마키아(Naumachia)에 물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기존의 수로들이 모두 동쪽에서 들어온 반면, 이 수로는 북쪽 마르티냐노(Martignano)호수에서 지하 수로를 통해 들어왔다.
서기 38년 카리굴라(Caligula)(37~41년) 때 시공되어 52년 클라우디우스(Claudius)(41~54년)가 완성시킨 아쿠아 클라우디아(Acqua Claudia) 수로와 아니오 노부스(Anio Novus) 수로는 둘 다 수비아코(Subiaco) 산지가 수원지였고, 성내에 들어와 합쳐졌다. 109년 아쿠아 트라야나(Aqua Traiana) 수로가 세워져 트라스테베레 지역에 브라치아노(Bracinao) 호수 물을 공급하였다. 마지막으로 건설된 수로는 3세기 초반의 아쿠아 알렉산드리나(Acqua Alexandrina) 수로로 네로 목욕장에 물을 공급하였다.
시내 일부 지역, 특히 콜로세움과 대전차 경기장을 연결하는 산 그레고리오 가도(Via di San Gregorio)와 동남쪽 성문인 포르타 마죠레(Porta Maggiore)에 수로들이 지나가는 거대한 아치 교각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수로 유적들은 로마 시에 국한되지 않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 당시 로마 제국의 속주들에도 남아 있다. 물 공급은 식수와 위생 면에서 곡물 공급과 함께 도시 유지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공공사업이었다. 수로를 통해 로마는 항상 물이 흐르는 도시가 되었다.
이와 같이 로마 인들은 자연환경에 의존한 식수 체계를 극복하고 건설사업을 통해 물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인구 증가, 도시 발전과 더불어 고지대 정주 특성이 작용하여 오늘날의 사람들도 놀라워하는 수로망을 확보하였다. 간단히 말해 수로는 고대 로마 시를 물리적으로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조물이자 로마 문화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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