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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로마사 (Roma History)

로마 목욕 문화(1)

by TES leader 2021.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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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국영목욕장 테르메 (terme)

   목욕 문화의 만개

 

목욕과 포도주, 비너스가 우리 몸을 망가뜨리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balnea vina Venus corrumpunt corpora nostra sed vitam faciunt).”

- 제정기 로마 시민의 비문

 

나는 목욕탕 바로 위층에 사는데, 마사지하느라 등을 두드리는 소리, 공놀이하면서 질러대는 소리, 도둑놈들, 수다쟁이들, 다이빙하느라 텀벙대는 소리, 털을 뽑을 때 지르는 소리, 때를 벗기는 자들, 음료를 파는 행상들의 호객 소리 등등, 얼마나 시끄러운지 차라리 귀머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 세네카의 서한집 56 1~2

 

목욕에서 신체의 힘과 청결을 찾는 건 결코 해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를 죄악의 길로 빠지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못된 행위이지 목욕이 아니다.”

- 제정기 교회 부속 목욕탕에서 발견된 비문

 

로마의 목욕 문화에 관해 후대에 살이 붙은 주장이 있는데, 바로 목욕 문화 쇠퇴론이다. 로마 인들은 남녀가 한 목욕탕에서 목욕을 했고, 목욕탕은 사치스럽고 부도덕한 자들이 어울려 노는 곳이었으며, 이러한 전반적인 도덕성 저하와 육체적 타락이 로마 제국의 쇠락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노老 플리미우스(G.Plinius Secundus)와 유베날리스(Iuvenalis), 마르티알리스(M.Valerius Martiali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nment) 등 당대의 이교, 크리스트교 저술가들의 혼욕에 관한 언급이나 하드리나우스(Hadrianus)(117~138)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61~180),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222~235) 황제가 취한 혼욕금지 조치가 마치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저술가들은 실제 목욕탕이 분리되지 않은 지역에 국한된 지역적인 문제를 언급했고, 황제들의 조치도 시설을 확충하는 차원의 내용이었다. 클레멘트는 여성 전용 목욕탕이 없는 지역에서의 혼욕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보았고, 여성 교인들이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품위 있게 행동하면 괜찮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사실 박해나 징벌을 가할 때 로마 정부는 목욕 금지 조치를 취했는데, 이에 대해 해당 크리스트교도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물론 목욕탕에 지나치게 자주 드나드는 데 해 절제를 강조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지만, 과다한 목욕이 육체적으로 해악을 미쳤다는 증거는 없다. 독실한 신도들도 목욕탕을 애용했기 때문에 주교들이 이들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목욕탕에 찾아갈 정도로 크리스트교 지도부는 목욕 문화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이에 반해, 중세 교회는 공중 목욕 자체를 도덕적인 면에서 부정적인 행위로 여겨 남녀를 불문하고 이를 억압했다.

로마 시가 급수 체계를 확보했다고 해서 오늘날처럼 일반 가옥에 상수도 시설이 갖춰진 것은 아니었다. 주택 수요가 인구 증가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주민들은 고층 임대 아파트의 방에서 생활했는데, 이러한 아파트들은 목욕 시설은 물론이고 급수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동네마다 비치되어 있는 공동우물을 이용해야 했다. 건물 간격도 좁은 데다 창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아 횃불과 화로에서 나오는 연기가 빠져나가기 못하고 집 안 벽 사이에 뿌연 안개를 이루었으므로 목욕탕에 가는 것은 즐거움이자 일상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로 마인들이 목욕의 즐거움을 향유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 로마 인들은 일과 후에 팔, 다리를 씻는 정도였고, 한 주에 해당하는 9일에 한 번 목욕을 했다고 한다. 테베레 강에서 목욕하는 관행이 없어지지는 않았고, 부엌에서 온수욕을 하기도 했지만, 그리스 세계의 영향을 받아 부자들이 집안에 목욕실(Lavatrina)을 짓고 시내에 목욕탕(balnea) 건물이 들어서고서야 목욕 관행은 일상화,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 목욕탕들은 개인이 영리 목적으로 운영하는 사설 목욕탕(Balena meritoria)이었는데, 그중에는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혼잡하고 시끄러운 대중탕을 기피하는 명사들은 고객으로 하는 목욕탕도 따로 있었다. 사실 집 안에 목욕실이 있어도 준비하기 번거로운 데다 목욕탕 내에서의 교제가 중요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이러한 사설 목욕탕을 주로 이용하였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볼 수 있고, 목욕실들로 이루어진 특이한 구조 때문에 일반 가옥들과 확연히 다른 가옥들이 그것이다. 기원전 33년 아그리파 가 재물 조사를 했을 때 로마 시의 대중 목욕탕은 170개였는데, 100년 후 노老 플리니우스는 너무 많아 세는 걸 포기했다고 하며, 4세기에는 거의 1,000개에 육박했다고 한다.

그러나 목욕 문화의 진정한 국면은 제정 초기에 국영 목욕장 테르메(terme)가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테르메는 목욕탕과 체육관으로 이루어진 목욕 시설에 도서관과 육상, 레슬링, 오락 시설, 상점 등 레크리에이션과 문화 활동 공간이 추가된 다기능 복합시설물이었다.

재력가나 황제가 기부한 돈으로 건축한 테르메는 국가 직영이 아니라 경매를 통해 운영권을 낙찰받은 청부업자에 의해 운영되었고, 입장료(balneaticum)는 보통 동전 한 닢이었다.

첫 국영 목욕장은 기원전 19년 아그리파가 판테온 남쪽에 건설한 아그리파 목욕장이다. 내전기에 옥타비아누스와 정치적 생명을 같이 했던 대장군 아그리파는 황제 자리에 오른 옥타비아누스, 곧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외동딸 율리아가 과부가 되자 그녀와 재혼해 기사층이란 신분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로 부상한 인물이다.

아그리파가 목욕장을 세운 지 81년 만에 그의 증손자이기도 한 네로(Nero)(54~68)가 판테온 서쪽에 네로 목욕장(Terme di Nerone)을 세웠는데, 현재는 그 자리에 이탈리아 상원 건물로 사용되는 마다마 궁전(Palazzo Madama)이 들어서 있다. 이 목욕장은 온탕, 미온탕, 냉탕을 대칭형으로 배치한 첫 목욕장으로, 풍자시인 마르티알리스가 네로보다 더 나쁜 게 무엇인가? 네로의 목욕장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는가?”라고 비꼴 정도로 화려했다고 한다. 227년 알렉산더 세베루스가 이 목욕장을 복구시키면서 알렉산더 목욕장으로 개칭하였다. 오피오(Oppio) 언덕 황금 궁전(Domus Aurea) 본관 뒤편에 세워진 티투스 목욕장은 80년 봄에 콜로세움과 동시에 준공된, 제정기 목욕장치고는 규모가 작은 목욕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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