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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_ 도안 (2)

by TES leader 2021.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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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코 수도회

프레스코의 도안은 제작자가 누구든 상관없이 반드시 이단설 심문관이라는 불길한 이름의 교황궁 공인 신학자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1508년 당시 이 자리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인 조반니 라파넬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단설 심문관직은 반드시 도미니크 수도사가 맡았다.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그들의 열성 때문에 도미니 카네스(주님의 사냥개)’라는 이미지가 씌워졌다. 수백 년 동안 역대 교황들은 그들을 장세나 종교 재판 같은 궂은일에 동원했다. 교단 소속으로 악명이 높은 수사들 중에는 토마스 데 토르쿠에마다라는 자가 있었는데, 1483년 종교 재판이 스페인에서 부활되자 2천 명가량의 이교도들을 불에 태워 죽였다.

이단설 심문관 라파넬리의 업무는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설교할 자를 선발하고, 필요할 경우 설교 내용을 사전에 검열해 이단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가차 없이 솎아내는 일이었다. 라파넬리가 고른 사람들은 누구든지, 심지어 에지디오 다 비테르보조차 시스티나 예배당의 설교사라는 영예를 잃지 않기 위해 설교 사본을 미리 제출해 검열을 받았다. 라파넬리는 설교 중에도 설교자가 누구이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논쟁의 소지가 있는 민감한 부분을 조금이라도 다루면 가차 없이 연단에서 내쫓아 버렸다. 또한 직무상 이따금 파리데 데 그라시의 도움을 받은 만큼 어떤 사소한 신학적 오류에도 경계를 항상 게을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당시 시스티나 예배당에는 라파넬리 못지않게 정통주의에 관심을 갖고 미켈란젤로의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제3의 인물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라파넬리가 설사 도안의 창작 과정에 직접 참여해 성서의 특정 내용을 지정하지 않았을 지라도, 화가들은 적어도 작업 중 여러 단계에 걸쳐 소묘와 밑그림들을 보여 주고 도안의 채택 여부를 타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이단설 심문관이나 다른 신학자들에게서 작업을 간섭받는 굴욕을 당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 사실은 천장과 관련한 구체적인 사정을 어느 정도 밝혀주는 것일 뿐 아니라, 실제로 미켈란젤로가 율리우스에게서 백지 위임장을 받았을 가능성까지 엿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미켈란젤로는 동시대의 다른 미술가들에 비해 내용이 풍부하고 복잡한 회화 작업을 해낼 수 있는 기초 소양을 충분히 닦은 것으로 보인다. 6년 가까이 로마와 피렌체의 부유층 자녀들이 교육받는 우르비노 학교에서 비록 라틴어를 배우지는 않았지만 독학으로 문법을 깨우쳤다. 또한 14세 때 산 마르코 정원 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저명한 교수들에게서 신학과 수학을 배웠다. 이들 권위자들 중에는 당대 최고 철학자로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의 우두머리였던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미란돌라의 백작 조반니 피코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저서와 난해한 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피코는 신비철학의 연구자이자 <웅변과 인간의 존엄 Oration on the Dignity of Man>의 저자였다.

미켈란젤로가 이들 인문학 대가들과 어느 정도의 친교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현존하는 초기 조각 작품 중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전투에 나선 인물의 누드를 양각 형태로 조각한 <켄타우루스의 싸움 The Battle of the Centaurs>이 있다. 그런데 아스카니오 콘디비는 확신 없는 말투로 이 작품이 산 마르코 정원 학교의 스승인 안젤로 암브로지니의 조언을 받아 조각된 것이라고 말했다. 폴리티안이라는 필명으로 더 유명한 안젤로는 로렌초 학교의 높은 기준에서 보더라도 깊은 인상을 남겼을 만큼 대학자였다. 그는 16세에 이미 4권으로 된 <일리아드 The Iliad>를 라틴어로 완역하기도 했다. 콘디비는 폴리티안이 이 어린 미술가를 너무나 끔찍이 사랑한 나머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자신의 학문 연구에 동참할 것을 권하거나 사물의 속성을 폭넓게 설명하고 과제물을 내주기도 했다.”라고 밝혔다. 이 저명한 학자는 사춘기 조각가 사이에 실제로 어느 정도의 교감이 있었는지는 어디까지나 추측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폴리티안에게서 훗날 천장 디자인의 창안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소양을 충분히 쌓은 것은 분명했다.

< 켄타우루스의 싸움  The Battle of the Centaurs>

1508년 여름도 다 끝날 무렵, 미켈란젤로는 새 도안 제작에 큰 진전을 거두어 교황의 주문 건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는 사각형과 원을 반복해서 연결한 기하학적 무늬 대신에 <카시나 전투>와 같은 인체 표현에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보다 야심한 구도를 준비했다. 그러나 붓 끝이 닿기를 기다리는 1천 평방미터나 되는 빈 공간은 피렌체에서 마주했던 평면 벽보다 훨씬 복잡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천장 전체를 벽화로 덮는 것 외에도, 예배당의 모서리를 차지해 천장과 벽을 연결하는 4개의 돛 형태 공간인 삼각 궁륭(펜덴티브)도 전체 공간에 포함해야 했다. 게다가 8개의 작은 삼각형 공간, 즉 창문 위로 돌출한 공복(스팬드럴)까지도 포함해야 했다. 또한 4면의 벽 꼭대기 부분, 다시 말해 창문 위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공간(반원 공간, 혹은 ‘작은달’로도 통한다.)도 사용할 계획이었다. 이들 표면은 평면과 함께 굴곡도 있고 면적도 넓은 부분이 있는가 하면, 그림 그리기가 도저히 곤란할 정도로 협소한 부분도 있었다. 따라서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불편하게 나누어진 공간들을 가로질러 프레스코를 배치해야 하는 곤경에 부딪혔다.

바치오 폰델리가 마감한 예배당 천장은 건축 재료로 탄산석회 침전물을 사용하고 장식용 석조물을 일체 덧붙이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미켈란젤로는 피에로 로셀리에게 삼각 궁륭과 반원 공간 위에 꾸며진 장식 벽돌, 즉 주물과 아칸투스 잎 장식 같은 소품의 상당수를 끌로 긁어내라고 지시했다. 그런 다음 예배당 내 장식용 처마 꼭대기와 벽기둥, 서까래, 까치발, 여 조각상 형태의 기둥, 성좌, 니치 등 율리우스의 영묘에 쓰려고 구상한 것들을 기억 속에서 되살려 프레스코에 가상적인 배경 건축물로 배치해 공간을 분할했다. ‘콰드라투라(quadrature)’라는 가상 무대는 마루의 관람객에게 조각 장식이 풍성하게 배치된 것 같은 인상을 줄 뿐 아니라, 보기 흉한 삼각 궁륭과 스팬드럴, 반원 공간들을 천장의 나머지 공간들과 통합하는 효과를 냈다. 게다가 많은 장면을 그릴 수 있게 특이한 형태의 화면들을 미켈란젤로에게 제공해 주었다.

미켈란젤로는 천장 길이에 따라 화면은 9개의 직사각형으로 나누어 대리석 서까래 그림으로 화면을 구분하고, 그림이 그려진 코니스(서양식 건축 벽면의 돌림띠)로 천장의 나머지 부분과 분리시켰다. 코니스 아래에는 니치를 집어넣고, 그 안에 성좌에 앉은 인물들을 그릴 계획이었다. 성좌들은 초안 중 끝까지 살아남은 부분인데, 12사도로 채울 계획이었다. 성좌 아래의 창문 주변에는 스팬드럴과 반원 공간이라는 빈 공간을 따로 마련해서 천장 기저(기초가 되는 밑바닥)까지 그림 공간을 연장해 나갔다.

일단 이렇게 기본 골격을 정한 미켈란젤로는 주제로 새로 정하는 작업에 들었다. 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과 장면을 선호해 신약성서의 12사도를 포기했다. 성좌에 앉은 사도들은 12예언자, 구약성서의 7 선지자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화에 나오는 5명의 여성 점쟁이로 대체되었다. 성좌의 인물 군상 위로 천장의 중심선을 따라 쭉 뻗은 직사각형 패널에는 창세기의 아홉 가지 에피소드를 집어넣었다.

미켈란젤로가 창세기에서 선택한 장면들은 노출이 심한 편이다. 이 삽화들은 부조의 주제로 인기를 끌었는데, 미켈란젤로는 수많은 예화 중에서 특히 시에나의 조각가 야코포 델라 쿠에르차(Jacopo della Quercia)가 볼로냐의 산 페트로니오 성당의 육중한 정문에 조각한 삽화에 친밀감을 느꼈다. 쿠에르차가 1425년부터 사망한 1438년까지 이스트리아 산 석재에 조각한 포르타 마냐(대관문)의 양각 삽화는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술주정’, ‘노아의 희생’, ‘이브와 아담의 창조같은 일련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쿠에르차가 이 장면들을 조각할 무렵, 또 다른 미술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는 때마침 피렌체의 산 조반니 대성당 부속 세례실에 설치할 청동 문짝 두 개 중 나머지 하나를 주물 중이었다. 기베르티는 문짝에다 쿠에르차가 삽화 형식으로 조각한 구약성서 장면들을 부조했다. 기베르티가 주조한 청문 문의 열렬한 예찬론자였던 미켈란젤로는 포르타 델 파라디조(천국의 문)’라는 셰례명을 헌정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쿠에르차가 만든 포르타 마냐의 부조에도 또한 감탄했다. 1494년 처음으로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에서 이것을 보았는데 1507년 볼로냐에서 동상을 제작하고 포르타 마냐 위에 설치한 인연인 있어 이 양각들과는 익숙했다. 그러므로 미켈란젤로는 1508년 여름에 프레스코 회화를 도안하면서 쿠에르차의 조각 형상들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을 것이다. 또한 시스티나 천장에 프레스코할 9개의 창세기 장면을 구상할 때는 틀림없이 쿠에르차와 기베르티의 작품들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구약성서 장면들은 사실상 미켈란젤로가 구상한 천장 장식 구도에 가장 가까운 선례였던 것이다. 이렇나 사살은 미켈란젤로가 천장 장식 구도를 자신의 뜻대로 했다는 주장에 한층 더 신빙성을 보탠다.

새로운 도안은 미켈란젤로의 엄청난 야망을 그대로 표출했다. 여러 장면을 짜 맞춘 구상화로서는 최대 규모인 천장화는, 150개 이상의 개별 그림 칸과 3백 명 이상의 개별 인물들을 포함했다. 교황이 제시한 구도를 형편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거부한 미켈란젤로는 훨씬 더 벅찬 과제에 도전했다. 그것은 주로 초대형 미술 작품만을 창작해 명성을 획득한 자에게도 엄청난 모험이었다.

로렌초 기베르티 (Lorenzo Ghibe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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