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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Italy94

로마의 부흥 - 코르소 길(Via del Corso) - 바티칸 교황청 시대 ■ 로마 시의 부흥과 공공 건축사업 1377년 로마로 돌아온 교황청은 화재 피해를 입은 후 방치된 라테란 궁전 대신 바티칸 궁전에 자리를 잡았다. 교황청이 좀 더 통제력이 강하고 방어상 이점이 있는 바티칸을 영구 거점으로 삼은 것은 시의 적절했다. 바티칸은 쉽게 요새화를 할 수 있는 언덕이 있는 데다 테베레 강과 아주 가까워 시내 중심이 바로 내려다보였고, 천사의 성이 가까이 있어 비상시에 피신하기도 좋았다. 게다가 크리스트교 공인 이후 순교지에 성당을 세우는 전통에 따라 베드르 대성당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궁전들이 들어설 부지도 충분했다. 15세기 교황청의 부흥은 100여 년에 걸친 혼란으로 쇠퇴를 거듭한 로마 시와 교황청 국가를 재건하면서 이루어졌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 2021. 1. 12.
교황청의 위기, 아비뇽 유수 그리고 대분열 ■ 교황파와 황제파 12세기에 들어 로마 시는 시민들의 자치정부를 세우려는 인민파와 교황청의 지원을 받는 귀족 세력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독일 황제를 지지하는 황제파(Ghivellini)와 교황을 지지하는 교황파(Guelfi)가 반목하는 상황이 한꺼번에 전개되면서 미묘하고 복잡한 상황에 처했다. 자치정부 운동, 소위 코무네[Comune] 운동은 중세 사회가 나름대로 안정을 찾고 도시기능과 경제활동이 회복되면서 도시 상층민들이 정치적 권리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었는데, 교황청이 자리 잡고 있어서 비교적 빨리 회복세를 보이고 고대 로마의 전통이 사라지지 않은 로마 시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성직자들의 타락과 탐욕을 질타하고 교회가 세속사에서 손을 떼고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치 종교 개혁의 기치를.. 2021. 1. 11.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진실의 입) / 서임권 투쟁 ■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과 진실의 입 광장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이현관 벽에 붙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틴(Santa Maria in Cosmedin)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성상파괴 운동과 관계가 있는 유일한 로마 성당이다. 비잔틴 제국에서 성상파괴운동이 발생하자 박해를 피해 로마로 도망쳐 온 그리스 인들이 이 성당 주변 지역에 자리 잡게 되었고,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가 이 성당을 개축 확장한 후 그리스 인들에게 양도하게 된다. 이 교황은 2차 니케아 종교회의(787년)를 주도하여 성상파괴운동을 종식시킨 인물이다. 그리스 인들은 성당 내부를 그리스어 코스미 디온(Kosmidion)(장식)이라는 말에 걸맞을 정도로 비잔틴 풍으로 장식해, .. 2021. 1. 10.
라테란 교황청, 천년의 역사 ▶ 라테란 교황청 천 년의 역사 ■ 라테란 교황청 크리스트교가 공인된 후 로마 주교 공관, 곧 교황청이 들어선 곳은 강 건너 바티칸이 아니라 첼리오 언덕 뒤쪽의 라테란 지역이었다. 요한 대성당과 주교 공관이 자리 잡게 되는 이 지역의 명칭은 라테 라누스 가문의 소유지에서 유래하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라테라누스 가문 출신의 둘째 부인의 궁전을 성당에 공관으로 기부했다. 이 가문에 대해서는 65년 원로원 의원 섹스투스 라테라누스[Sextus Lateranus]가 네로 황제를 제거하려는 피소의 역모에 가담했다가 처형되고 그의 저택은 몰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라테란 지역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바로 안에 있기 때문에 시내 중심에 있던 이교도 사회와 직접 부딪치지 않는 이점이 있었고, 크리스트교 사회가 완전히.. 2021. 1. 9.